인창동성당 게시판

9월16일 성고르넬리오교황과 성치프리아노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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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09-16 ㅣ No.643

축일:9월 16일

성고르넬리오 Cornelius교황 순교자(253년 순교)로마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성파비아노 교황의 순교 이후 14개월 동안 교황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사제단이 교회를 다스렸다.

고르넬리오의 친구인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판단에 따라, 대부분 성직자의 증언에 따라, 신자들의 투표로써, 원로 사제들과 선한 사람들의 동의로써 251년 교황에 선출되었다."고 적고 있다.

 

교황으로서 2년간의 재임 기간 중 고르네리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박해 시기에 배교했던 그리스도인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과 고해 성사에 관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두가지 견해로 결국 둘 다 단죄받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대주교인 치프리아노는 배교자는 주교의 결정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확립시키려고 교황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고르넬리오는 로마 주교의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노바시아노(교회를 다스리던 사람 중의 한 사람)라는 한 사제가 로마의 주교가 되어 그와 맞서 대항했다.

 

노바시아노는  바로 최초의 대립 교황이다.

그는 교회가 배교자뿐 아니라 살인,간통,간음,축첩 등의 죄를 지은 자들까지도 용서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했다.

 

노바시아니즘이 비록 몇 세기 동안 지속되기는 하였지만, 고르넬리오는 노바시아니즘을 배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특히 아프리카의 치프리아노)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성고르넬리오는 251년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배교자들도 관례적인 ’참회의 처방’으로써 교회에 되돌아올수 있다고 지시했다.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의 우정은 치프리아노의 반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치프리아노를 고발했을 때 얼마 동안 긴장 상태에 있었으나 문제는 해결되었다.

 

고르넬리오 문서는 3세기 중엽의 교회 조직의 범위를 보여 준다.

그 문서에 의하면 46명의 사제와 7명의 부제, 7명의 차부제가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수는 약 5만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고르넬리오는 253년 치비타베키아 근교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중에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져 갈리스토 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회사에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오류가 수시로 제창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사실인 것 같다.

 

3세기에는 우리가 별로 고려하지 않던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다.

그것은 성찬의 전례 전에 고해를 한다는 것과 대죄를 범한 후에 교회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 같은 사람은 엄격주의와 방임주의의

양극단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발견함으로써 교회를 도운 하느님의 도구였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으로 새로운 경험을 평가하고, 그리스도께서 시작한 것을 계속 지키면서 영원히 살아 있는 교회 전통의 흐름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롤리너)

 

 

 

로마의 사제이던 그는 성 파비아노 교황의 순교 이후 거의 14년 동안이나 지연되어 오던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되어 지연된 것은 데치우스의 크리스챤 박해 때문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동안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다.

 

그는 배교자들의 합당한 통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한 반면,

배교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고, 교회가 그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투스 일파를 공격하던 카르타고의 주교

성 치쁘리아노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한편 그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는 없을 뿐더러, 이제 자신이 교황이라고 선언했던 로마의 사제, 노바투스와 그를 정점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노바투스가 첫번째 대립 교황이다. 노바투스의 극단주의를 옹호하는 무리들은 재차 힘을 규합하였고,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르넬레오는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고, 합당한 보속을 이행한 후에는 교회 출석과 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고르넬리오의 제의로 251년 10월에 개최된 서방 주교들의 시노드는 노바투스 일파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황제 갈루스가 253년에 또 다시 크리스챤 박해를 재개하자, 그는 첸뚬첼레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교회의 으뜸도 하나이다.

이 으뜸 주교좌는 본래 주님의 권위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제단이나 다른 제관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격정이나 무모함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짓이고 속된 것이며 독성적인 일임에 틀림없다."(성치프리아노, ’가톨릭 교회의 일치’)

 

 

축일:9월 16일

성치프리아노Cyprianus 주교 순교자(200 ? -258) 258년 카르타고

 

치프리아노는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3세기의 그리스도교 사상과 관습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유명한 웅변가이었으며, 210년경 카르타고의 이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246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분배했으며 세례받기 전에 순결을 맹세함으로써 그의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개종 2년만에 서품을 받았으며, 그의 뜻과는 달리 오늘날 튀니스 근처에 있는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택되었다.

 

치프리아노는 교회가 누려 온 평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을 약화시켰으며, 진정한 신앙을 갖지 않은 개종자들에게도 문을 열어 주었다고 개탄했다.

 

데치아노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교회를 떠났다.

 

이들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3세기에 가장 큰 논쟁점이 되었으며, 이것 때문에 교회가 고해성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노바투스는 치프리아노가 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했던 사제로서 치프리아노의 부재중에 스스로 나서서 일했으며 (그는 은밀한곳으로 물러나서 교회를 이끌었는데 이것이 비난을 사게 되었다)아무런 교회법적인 참회를 부과하지 않고 모든 배교자들을 받아들였다.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치프리아노는 중도의 입장을 취했는데 실제로 우상 숭배를 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써만이 친교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우상 숭배를 했다는 증명서만을 산 사람들은 일정 기간의 참회 기간을 거친 후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것조차도 새로운 박해 동안에는 완화되었다.

카르타고에 흑사병이 만연하는 동안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적과 박해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촉구했다.

고르넬리오 교황의 친구인 그는 다음 교황인 스테파노를 반대했다.

 

치프리아노와 다른 아프리카 주교들은 이단자와 분리론자들이 행한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적인 견해는 아니었지만 치프리아노는 스테파노의 파문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에게 추방당했고 그 후 재판을 받기 위해 소환되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순교를 목격해야만 한다는 주장과 함께 도시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치프리아노는 친절과 용기, 격정과 인내를 함께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쾌활하고 진지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는 것인지 혹은 존경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세례 논쟁 동안 온화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참회에 관한 논문을 쓸 당시에 자신의 감정을 염려했음에 틀림없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치프리아노가 영광스러운 순교로 자신의 분노를 속죄했다고 말했다.

 

그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따를 수 있고 우익 또는 좌익의 어떤 과정에 의해서도 전환될 수 없는 가장 옳은 판단을 통해서 힘든 발전을 길을 가야만 했다.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 교회를 갖지 않듯이 당신의 아버지를 위해 하느님을 가질 수 없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그리고 그의 교회도 하나이다.신앙도 하나이다.

 

사람은 모두 강력한 하나의 조직체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상속자라면, 그리스도의 평화속에 머무르자.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평화의 애호자가 되자."

(성치프리아노, ’가톨릭교회의 일치’)

 

그는 매우 어지러운 시대에 자신의 모범과 저술로써 교회를 탁월하게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먼저 유배되었다가 258년 9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카르타고 출신으로 보이는 타쉬우드 체칠리우스 치쁘리아누스는 외교인 수사학자이자 법률가였고 또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에 노사제인 첼리치우스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즉시 그 당시 저명한 성서 학자가 되었고, 유명한 저술가가 되는 정력을 보였다. 그는 곧 사제로 서품되었고, 2년만에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치쁘리아노는 249년에 일어난 데치우스의 크리스챤 박해를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숨은 곳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자기 교구를 계속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므로,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지만, 많은 교구민들이 박해 동안에 배교하였고, 또 자신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던 사제 노바투스는 이단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즉 노바투스 신부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치쁘리아노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고 노바투스를 공공연히 고발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251년의 카르타고 공의회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그는 저 유명한 저서인 "교회의 일치"를 썼다.

 

그러나 노바투스는 로마로 가서, 치쁘리아노가 열렬히 지원하는 교황 고르넬리오를 반대하여 반교황이 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252년~54년 사이에 카르타고는 몸서리치는 페스트가 창궐하였다.

치쁘리아노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였으나, 신자들은 페스트가 치쁘리아노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비난하였고, 또 격렬하게 항의까지 하였다.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에 대하여"란 책을 저술하였다. 그 후 얼마 뒤에, 그와 아프리카의 다른 주교들은 교황 성 스테파노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한 반면에, 그들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55년~56년에 열린 아프리카 회의는 이단자로부터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고, 치쁘리아노는 교황 스테파노와 신랄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당시에 로마 황제는 크리스챤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토록 요구하는 칙서가 내려졌는데, 치쁘리아노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츠누스에 의하여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인 쿠루비스로 유배되었다.

또 다음 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은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 칙령이 내렸다.

치쁘리아노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가 부임하기 전에 소환되었는데, 그가 끝까지 이방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기를 거부하였으므로, 결국 참수당하고 말았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동정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수많은 신학 논문을 남겼다.

참으로 그는 크리스챤의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을만 하다.

 

♬Canto Gregoriano-Kyrie XI(베네딕도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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