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인형과 인간(무소유 - 20-4)

인쇄

비공개

2010-06-16 ㅣ No.12424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오늘날 종교가 종교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요인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도록 복합성을 띠고 있다.
 
지나간 성인들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간단하고 명료했다.
들으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학자(이 안에는 물론 신학자도 포함되어야 한다)라는 사람들이 튀어나와 불필요한 접속사와 수식어로써 말의 갈래를 쪼개고 나누어 명료한 진리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 자신의 문제는 묻어 둔 채,
이미 뱉어 버린 말의 찌꺼기를 가지고 시시콜콜하게 뒤적거리며 이러쿵저러쿵 따지려 든다.
생동하던 언행은 이렇게 해서 지식의 울 안에 갇히고 만다.
 
이와 같은 학문이나 지식을 나는 신용하고 싶지 않다.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을 내면서 살려는 데에 맹점이 있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아무리 바닥이 드러난 세상이기로,
진리를 사랑하고 실현해야 할 지식인들까지 곡학아세(曲學阿世)와 비겁한 침묵으로써 처신하려 드니,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배반이다.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된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 일은 무엇일까.
먼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인형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명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학(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학문에 대한 무용론도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는 것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성을 경계한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발랄한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지식에서 추출된 진리에 대한 신념이 일상화되지 않고서는 지식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 시대의 실상을 모른 체하려는 무관심은 비겁한 회피요, 일종의 범죄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나누어 짊어진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 나누어 가질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다.
 
                                                            - 법정, 1974 - (무소유 - 20-4)


21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