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게시판

현실 속에서의 신앙 정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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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수 [bada0101] 쪽지 캡슐

2002-05-18 ㅣ No.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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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청년게시판에 글이 올라 오지 않네요.. 때론 민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게시판에 너무 감성적인 글만 올린 것 같아 아래 글을 올려 봅니다.

 

*이유는 신앙은 "단순한 믿음"도 소중하나 "이성적 문제 제기과 자기 비판"도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러한 점에 대한 극복은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순명적 신앙과 함께 창조적 신앙, 건설적 신앙도 청년에게는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래 김항섭 님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어 올릴까 말까 잠시 주저하다

올려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좋은 글입니다.)

 

 

* 자세한 것은 아래 홈페이지를 참고하십시요.

(저는 글을 읽고 스스로에게 문제 제기를 해 보았습니다.)

  http://religion21.org/main.htm

 

 

* 이 글은 98년 6월 17일 전진상 교육관에서 열린 평신도 신앙 교육기관 설립에 관한 세미나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신앙 교육의 문제와 대안 교육의 방향(시론)

 

김항섭(우리신학연구소 소장)

 

1.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 특히 평신도를 위한 - 대안 신학 교육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그러나 사회 일반에서 이미 시도되고 있는 대안 교육처럼 쉬이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IMF 관리 체제로 들어가면서 재정적인 측면에서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논의의 가닥을 잡으려면 무엇보다도 문제의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문제를 명확히 할 때 우리는 해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대안 신학 교육을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적어도 진보적인 신앙 운동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기존의 신앙 교육이나 신학 교육이 뭔가 잘못되어 있고, 또 뭔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신앙 교육 또는 신학 교육이 범하고 있는 - 특히 교육의 기본 지향, 방식,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의 - 잘못과 한계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비판하고 극복하면서, 현 단계의 진보적인 신앙 운동이 특히 교육적 차원에서 갖는 바람을 담아 내는 선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안 신학 교육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먼저 기존 신앙 교육 또는 신학 교육의 문제나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보통 본당 단위로 이뤄지는 이른바 신자 재교육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 여기서는 보다 본격적인 형태의 신학 교육 형태에만 주목해 보자. 기존의 신학 교육은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제도 교회의 공식적인 교육 기관에서 이뤄지는 형태, 특히 신학교와 교리신학원이 있다. 그리고 이 형태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 시도로, 진보적인 신앙 운동의 틀 안에서 이뤄져 온 다양한 형태의 신앙 교육이 있다.

 

3. 교회의 공식 교육 기관을 통해 이뤄지는 신학 교육은 대개 제도로서의 교회를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한 사제 - 그리고 보조적으로는 수도자 - 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교육 기관은 무엇보다도 평신도를 위한 신학 교육 기관이 아니고 따라서 평신도가 신학을 공부할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비교적 평신도에게 열려 있는 교육 기관은 신학교 부설 교리신학원이나 서강대의 수도자 대학원이 있다. 그러나 이 둘 다 기본적으로는 수도자 중심이다. 또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신도들에게 좋은 신학 공부의 장이 되었던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 신학 전공 과정도 이제 더 이상 학생을 받지 않고 있다.

수도자 대학원의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그 밖의 제도 교육은 신학교이든 교리신학원이든 교육의 기본 지향, 방향과 내용에 있어 크게 다를 바 없다. 사실 교리신학원은 신학교의 정규 신학 교육을 시간만 반으로 줄인 형태로서 정규 신학 교육가 갖는 모든 문제점들을 수도자와 평신도 차원에서 재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이러한 제도 교육은 무엇보다도 제도로서의 교회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신자 일반의 신앙 실천과 철저하게 괴리되어 있다. 신학이라는 것은 신앙 실천이 먼저 있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신앙 실천이라는 1차적인 행위가 있을 때 신학이라는 2차적 행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고민, 아픔, 기쁨, 희망 등을 담아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원래적 의미의 신학으로서 아무런 구실도 못하는 죽은 신학이다. 기존의 신학 교육이 전통적인 신학 구분과 그에 따른 구태의연한 커리큘럼에 바탕해 현실과 무관한 추상적 논의만 거듭하거나 서구 신학을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는 것도 무엇보다도 현실과 유리된 신학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생명력과 추동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논의와 논쟁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한 현실적인 삶 안에서 스스로의 생명력과 추동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내용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형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르치는 자가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나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앞서 서구에서 배운 지식을 이 시대 이 땅이라는 채를 통해 거르지 않은 채 그대로 전달할 수밖에 없고, 배우는 자 또한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솟구치는 고민이나 의식으로 바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주입된 지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공식적인 신학 교육은 현실과 높은 담을 쌓는 폐쇄적인 교육 시스템이기 때문에, 역사와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이런 저런 모순과 문제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고 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평신도가 신학할 가능성은 본질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다.

또한 공식적인 신학 교육은 교육 이후의 과정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나 배려가 전무하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의 관리자 양성에 초점을 둔 공식적 신학 교육에 단지 주변적인 형태로만 참가할 수밖에 없는 평신도의 경우에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사제나 수도자와 달리 이러한 교육의 기본적 지향인 제도 교회의 관리나 유지에 그다지 유용성이 없는 평신도에 대해선 교육 이후의 과정에 대해선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 그나마 어렵게 배운 지식을 사장하기 십상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평신도의 신학 공부는 대체적으로 경제적 시간적 여유 있는 사람들의 교양 쌓기 정도로 변질될 공산이 크다.

 

5. 진보적인 신앙 운동은 기본적으로 예언자적 정신으로 스스로 거듭나면서 사회를 복음화하는 교회의 소명을 일깨우는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제도의 관리와 유지 차원에서 이뤄지는 공식적인 신학 교육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구조적으로 공식적인 신학 교육에 참여할 기회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대안적인 형태의 신앙 교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신자 일반, 특히 진보적인 신자 일반과 그들의 운동 선상에서 이뤄지는 신앙 실천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성찰하고, 나아가 그러한 실천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신앙 교육의 장을 개척하고 넓혀 갔다. 이 신앙 교육은 무엇보다도 제도 교육의 문제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역사와 현실 안에서 숨쉬는 신앙과 신학 교육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는 지닌다. 또한 구체적 삶 안에서의 신앙 실천이라는 기본 화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단순한 신앙 교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제반 문제를 보다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사회과학 교육을 병행해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아가 활동가 양성이라는 목적 의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교육 이후의 과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으면서 교육 사업을 수행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앙 교육은 보수적인 제도 교회의 공세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 실천을 정당화하는데 지나치게 몰두했기 때문에 신학이 신앙 실천과의 관계에 있어서 갖는 역동적이고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기도 했다. 신학은 신앙 실천을 단순 반영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신학은 이러한 "비판적" 기능을 통해 기존의 신앙 실천의 문제나 한계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내면서 보다 나은 신앙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망 또한 내포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현실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도입되었던 사회과학 교육이 주로 특정 이데올로기에 바탕해 이뤄졌고 나아가 그 특정 이데올로기로 신학의 방향과 내용을 재단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 실천이 1차적 행위이고 신학이 2차적 행위이라면 신학이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과 대화하는 것은 신앙 실천이 갖는 함의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한 3차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과 사회과학 또는 인문과학과의 대화는 상호적이고 역동적이고 보완적인 형태로 이뤄져야지 어느 일방이 타방을 규정하는 것은 문제를 왜곡하기 쉽다.

또한 이런 형태의 신학교육은 그때그때 운동의 필요에 따라 자발적이고 분산적인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신학 교육을 기획하거나 추진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일정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신학 교육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읽을 수 있다.

 

6. 우리는 기존의 두 가지 형태의 신앙 또는 신학 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를 살펴보았다. 대안 신학 교육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러한 교육 형태들이 개선될 소지가 있는가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있다면 굳이 대안 교육 기관을 따로 만들어 운영할 필요가 없다. 그럴 경우 단지 그 교육 기관에 합류 또는 참가해 문제점들을 개선을 해 나가면 된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 와 같이 기존의 공식적인 신학 교육의 경우 현재와 같은 문제와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일시적인 요인보다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관리, 유지한다는 교육의 기본적 지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이 기본 지향을 버리지 않는 한 크게 개선될 여지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진보적인 신앙 운동 안에서 이루어져 왔던 신앙 교육들은 기본적으로 교회 쇄신과 사회의 복음화라는 지향을 갖기 때문에 그 교육 형태가 갖는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 따라서 우리의 대안적 신학 교육 논의는 이러한 형태의 교육 형태가 갖는 문제나 한계를 비판적으로 추스르면서 현 단계의 진보적 신앙 운동이 교육적 차원에서 갖는 바람을 담아 내는 형태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7. 80년대 말 이후 일반 사회 운동의 전반적인 침체와 더불어 천주교 내의 진보적인 신앙 운동도 그 운신 폭이 크게 좁아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들어 다소 더디긴 하지만 정치적 민주화와 시민사회 일반의 활성화와 더불어 진보적인 신앙 운동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형태의 운동 전개보다는 기존의 운동 방식을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운동 방식이나 내용을 모색하는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적 모색은 대체적으로 이전의 진보적인 신앙 운동이 명목상 내걸었지만 등한시했던 교회 쇄신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재 과거의 반성과 미래에 대한 모색이 조금 분산적이고 사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과 모색을 모아 보다 체계적으로 엮어 내고, 그렇게 모아진 논의들을 교육하고 확산하며, 또 다시 현장 속에서 검증 받기 위한 고리로서 평신도 신학 교육기관의 존재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교육기관은 이전의 운동이 교회 쇄신에 대해서 이렇다 할 활동이나 전망을 갖지 못한 상황임을 고려할 때, 교회 쇄신에 대한 각종 주장들을 구체적인 검증 장치를 통해 활동으로 엮어 내고 확산하기 위한 매개로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8. 대안 교육으로서 새로운 신학 교육은 최소한 앞에서 말한 두 가지 형태의 신앙 또는 신학 교육이 갖는 문제나 한계들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신앙 또는 신학 교육 형태의 일부 측면의 개선에 그쳐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더구나 기존의 신앙 또는 신학 교육의 오류를 반복하는 형태로 이뤄질 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 근거를 스스로 허무는 셈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근본적인 사고 전환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교육기관의 기본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9. 새로운 교육기관은 첫째 교회의 쇄신과 사회의 복음화를 각자의 신앙 실천 단위에서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추동할 수 있는 평신도 지도 역량을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즉 대안 신학 교육은 공식적인 신학 교육과 달리 제도의 관리와 유지가 아니라 교회의 쇄신과 사회의 복음화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나아가 이전의 진보적인 신앙 교육 형태와 달리 일시적이고 분산적이고 활동가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신앙 실천 단위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평신도 일반의 지도 역량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제고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층의 교양 쌓기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면 대안신학교육으로서 의미가 없다.  물론 이 층의 사람들이 대안 학교의 재정적 기반 확충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고 또 나아가 이들 역시 신학 교육의 엄연한 소비자층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욕구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새로운 교육기관의 기본 방향은 대안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 쇄신과 사회 복음화를 지향하는 대안 교육이라면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개별적, 또는 집단적 신앙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나 고민들에 응답하고 나름의 희망이나 대안을 부추길 수 있는 형태로 이뤄져야 한다.

둘째 단순히 실천적 역량 뿐 아니라 평신도의 신학적 역량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는 비판적인 평신도 신학자 양성을 위한 대중적 토대를 마련하고 확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좁게는 새로운 교육기관이 지속적인 재생산 구조를 갖고, 넓게는 진보적인 평신도 운동이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 지려면 평신도 신학자들이 양성되어야 하고 새로운 교육기관은 그 양성의 터전으로 작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학 교육의 방식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의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 주는 형태여야 한다.

셋째 학계나 기타 교회 기관에 산재해 있는 비판적인 신학 전문가, 또는 관련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직접 평신도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조직화하는 형태이어야 한다. 우리 교회 안에 수많은 쇄신과 비판의 목소리가 있어도 그것이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목소리를 수용해 신앙의 현장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세력이 형성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예언적 목소리와 쇄신을 추진할 세력간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지속적인 형태로 각종 신앙 실천들을 추동할 수 있는 구조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안 신학 교육은 그러한 비판적 목소리를 모으고 거르고 구체적인 신앙 실천들을 추동할 수 있는 매개로서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10. 우리는 특별히 교육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의 등을 통한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은 실천적 동기 부여로 이어지기보다는 개인적인 교양이나 지식 쌓기에 그칠 우려가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대안적 교육 형태는 무엇보다는 대화와 토론 등의 방식을 통해 피교육자인 신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이러한 자발성 훈련과 배양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각자의 신앙 현장에서 응용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형태이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교육 효과를 위해 학자 일색의 강사 배치보다는 현장의 전문가나 활동가들 또한 동원해 이론과 실천의 보다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진보적인 신앙 운동 단체나 유관 기관에서 자원 봉사하는 현장 학습 문제도 능동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11. 교육 내용 또한 기존의 신학 교육의 틀을 탈피해야 한다. 우선 현실 사회에 대한 이해를 - 비록 입문적인 성격일지라도 - 교과목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신앙 활동, 그리고 그 활동의 기본적인 과제인 복음화는 교회 공동체 내부 성원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외부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현장과 그 현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희망을 이해하지 못할 때 복음화는 그 원래 의미를 상실하기 쉽다.

 

둘째 전통적인 신학 구분이나 교육 과정에 따른 과목이나 주제 배치보다는 신자들이 신앙생활 안에서 제기되는 각종 고민, 아픔, 희망과 절망 등을 지적으로 거르고 나름의 대안을 찾으려는 의지를 담아 내는 형태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 신앙의 성서적 또는 교의적 전거를 새롭게 해석해 내야 한다. 그 전거도 기존의 전통적인 정의나 구분에 지나치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 레지오 마리애 운동은 천주교 신심운동의 핵심이 되고 있으나 오히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보수적인 신앙의 온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교과 과정에 포함시킬 수 있다. 또 오늘날 크게 번창하고 있는 성령쇄신운동과 성령론도 같은 맥락에서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게 좋을 듯 싶다.

 

이러한 성서적 교의적 전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바탕해 오늘 사회 속에서 신앙실천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실천 신학적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성모마리아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오늘날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여성신학적 성찰을 과정 안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여성신학은 수녀장상연합회를 중심으로 기존의 사제 중심 사목에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 교회의 대다수 성원이 여성인 점을 감안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우리 교회에 크게 번지고 있는 소공동체 운동에 관한 논의도 일정한 형태로 담아낼 필요가 있고, 그리고 세계화, 정보화, 지역화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무엇보다도 경제 문제나 정보 사회, 또는 지역 선교에 대한 신학적 규명이나 성찰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만이 신자들의 신앙 생활과 복음화 활동에 유용한 모든 지식이나 방법론을 제공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형태의 지식이나 방법론을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으로부터 과감하게 차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 또는 교회의 각 단체나 운동은 기본적으로 비영리단체이므로 이 단체나 운동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비영리단체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는 신자들에게 유용한 지식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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