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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주님, 제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섬돌 선교사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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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4.10.164.*]

2011-03-25 ㅣ No.9410

 
 
(참 소중한 당신 8월호에 게재한 글).


[주님, 제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신앙생활 10여 년 동안 신자들이 주는 상처로 인해서
냉담할 수 있었던 계기가 20번도 넘는다면 믿을 수 있을까?
물론 내게 새로운 희망의 바탕이 신앙으로 인해서였기 때문에
엄청 날뛰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따금씩 신앙생활을
햇수로 계산하여 취급하는 사람들을 만나게되면
속이 여간 끓어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모르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말이 답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퇴근 무렵이 되어 총회장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날라 왔다.
신부님이 찾으시니 곧 바로 성당으로 와달라는 것이다.
신부님의 말씀이라니 예수님의 명령이 아닌가?
의아스러운 가운데서 부랴부랴 성당으로 달려갔더니
새로 오신 신부님께서 대뜸 나보고 선교분과장의 중임을 맡으라고 하신다.
뭘 아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정말 그땐 엄청 당혹스러웠다.
또 옆에서 총회장님은 한술 더 떠서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니
순명하는 정신으로 해보라는 것이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머리가 혼돈 서러웠다.

순명이라는 말에 얼떨결에 수락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자책감 때문에
그날 엄청 후회를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 신부님께서
내게 선교분과장이란 직책을 맡기셨기 때문에
배우기 위해 교리신학원을 다니게 되었지만
좌우지간 이로 인해서 난 또 한번의 인생 탈바꿈이 시작된 것이다.

2년간의 교리신학원 생활은 내게 엄청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난 젊은 사람들에게 뒤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교수신부님들의 말씀을 한 시간도 빼먹지 않고 녹음을 했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녹음기를 틀고 다시 복습을 하곤 했다.
그 당시의 습관이 아직도 버려지지 않고 있지만,
아침 9시까지 출근하고 나서 오후에 학교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새벽 2-3시까지 숙제와 공부를 하는
하루에 4시간 잠을 자는 생활은 여간 힘들지 않았지만
그 때 내게 웬 열정이 그렇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망해버렸던 뒤끝이라 집안에서 책 구경이라고는 할 수 없었는데
이젠 집사람이 내게 책방 차려도 되겠다고 할 정도로
지금 책장에 정리되어 있는 가톨릭 서적만 약 200여권이 되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많은 책을 구입했지만 매일 학교에서 내어주는
레포트 숙제하기에 바쁘다 보니 필요한 부분들만 찾아 읽게 되고
아직 다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렇게 레포트에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분주했던
신학원 생활도 금방 2년이 지나버리고 2000년 1월 16일
난 졸업장과 함께 정진석 대주교님으로부터
선교사의 임명과 교리교사의 자격을 받았다.

물론 본당에서는 신부님께서 교중 미사 중에
다시 신자들 앞에서 수여식을 해주셨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님께서
내가 받아온 졸업장과 선교사증을 달라고 하시더니
그날 밤 당신의 방에 두시며 그 이튿날 내게 돌려 주셨다.
분명 내가 잠자고 있는 시간에 당신께서는 그것을 바라보며
기도하셨을 것이다.
저를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 무엇을 시작해야합니까?]

막상 선교사란 직책을 부여받고 보니 처음엔 어려움이 많았다.
비록 교육은 받았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하기만 한데
무엇을 해야하는지 망설여지기만 했다. 교회를 쫓아갔다.
그리고 성체조배를 드리면서 주님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나약하기만 저에게 무엇을 시키시렵니까?" 하고
며칠을 묵상하면서 기도 드렸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받은 졸업장과 교리교사 자격증
그리고 선교사 임명장을 신부님께서
다시 본당에서 수여식을 하고 나니까
그 순간은 좋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더 주님께 "이걸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고 반문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도 드리던 어느 날부터 난
그 동안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과 녹음한 테이프를 토대로 해서
우선 교리상식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교회가 신자들에게 재교육을 시켜주어야 할
과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글을 하나 둘 만들면서
천주교 카페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글을 게재하여 보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신자들이 긴 장문의 글을 읽어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은 사이버 상이지만 이곳에도 인맥이 형성되어
우선 알고 있는 사람들의 글을 열어보는 것 같았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글을 게재할 때, 긴 장문의 글이면
보지도 않고 닫아버린다는 것이 카페 안의 공통 문제점이었다.
내가 글쓰기에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교리교사 카페에
글을 올리고 나서부터 신바람이 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교리교사들에게는 아주 유익하게 쓰여지기 때문에
특별히 방을 따로 만들어 주면서 그곳에 올려주기를 희망하였다.

처음엔 엉성하고 서툴기만 하였던 글들이 100회가 되고
200회가 되면서부터 어떻게 글을 올리면 신자들이
잘 읽을 수 있는지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교리상식은 540회를 넘어섰고
신자들의 구미에 맞는 신앙이야기도 600회에 도달하였다.
이젠 천주교 사이버 안에서 웬만한 사람들에게 섬돌선교사라고 하면
아하 하고 알아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곳 저곳 본당에서 부름도 많았고
예비신자 교리 의뢰도 많이 들어왔다

영원에서 영원으로섬돌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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