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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사랑] 할아버지의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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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 [Almaz] 쪽지 캡슐

1999-06-30 ㅣ No.645

 

벚꽃이 지던 그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하얀 봉투를 발견하곤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나와 내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가 국수를 뽑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생활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돈도 벌 수 있는 산업체 야간학교를 택했다.

 

학교에 입학하여 첫 월급을 타던 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봉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대견하다며 연신

눈물을 찍어 내셨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천원

짜리 육십장을 천천히 세어본 뒤, 귀가 접힌 돈과 앞뒤가 뒤집힌 돈을 차례차례

귀를 펴고 맞춰서 툭툭 다독이셨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던지 할아버지 앞

에서 한달 용돈을 기다리던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내가 고생하면서 번돈이니 마음대로 쓰라셨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호되게 야단치고 달랑 천원짜리 석장을 내미셨다. 나는 속으로

'내 돈인데...'하며 뾰로통해졌다. 월급봉투를 서랍에 집어넣는 할아버지가

너무 야속해서 그날 밤 나는 그대로 회사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매번 할아버지 앞에서 삼천원을 타기 위해 기다린 지루함이

먼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책상 서랍 한쪽에서

가지런히 귀가 맞추어진 지폐 몇장이 든 돈봉투와 스물일곱장의 월급봉투,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번도 '수고했다'는 말씀이 없었던 할아버지셨지만 월급봉투 한 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보관한 것으로 보아 나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이름 석 자가 또렷이 박힌 월급봉투를 안고 나는 한참이나 울었다.

 

                                              -김용태[행복수첩],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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