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9월27일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제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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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09-26 ㅣ No.666

 

축일 : 9월 27일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제 V.De.Paul (1581-1660년) 창설자. 프랑스

 

프랑스의 농부인 쟝 드 폴과 베르트랑드 드 모라스의 6남매 중 셋째 아들인

성 빈첸시오는 남서프랑스의 랑퀴엔(푸이)에서 태어나 ,남달리 총명했던 12살 때 닥스에 있는 코르들리에회 수도원에 보내져 드 코메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신학과정(닥스 대학교와 뚤루즈 대학교에서 수업)을 마친후, 1600년 9월 13일 생 줄리앙성의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605년, 그는 유산 문제로 마르세이유에서 돌아오던 중에 이슬람의 해적들에게 잡혀 알제리아의 노예로 팔리는 불운을 겪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1607년에 아비뇽으로 탈출하였고, 그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1608년 파리에서 드 베뢸 신부의 영향으로일생을 자선활동에 바칠 것을 결심하였고,

클리쉬 주임신부로 일하였으며, 파리 발로아에서 1610년 마르그리트 여왕의 빈민 구제계를 담당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업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1617년 샤띠옹 레 동부에 주임신부로 부임한 빈첸시오는 40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 본당에서의 여러 가지 병폐등을 개선하는 한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애덕부인회’ 를 창설하여 그들을 돌보게 하였다.

(1618년, 그는 성 프란치스꼬 드 살을 파리에서 만남으로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빈첸시오는 죽어 가는 어떤 하인의 고백으로 프랑스 농민의 절실한 영적 요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가스코의 조그마한 농가 출신인 그의 생애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조그마한 야망을 가진 사제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가 도와 준 하인의 주인인 공대 백작 부인은 시종들과 소작인,그리고 평범한 시골 사람들처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려하는 유능하고 열성적인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단체를 후원해 주도록 남편을 설득하였다.

1625년 1월 25일에는 당시 폐쇄적인 성직자들의 양성과 재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선교회 (라자리스트회)’를 창설하였다.

빈첸시오는 매우 겸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회는 "빈첸시오회와 라자로회"로 알려졌고, 주로 농부들에게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정결,청빈,순명과 성실의 규율을 지키기로 맹세한 이 사제들은, 조그마한 마을과 촌락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쳤다.

또한 그는 빈자들을 돕기 위하여 본당 단위의 회를 구성하였으며,당시 많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가정을 가진 애덕회 부인들 만으로 간호할 수가 없어,

성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을 얻어 1633년 11월 29일 가난한 이들의 영신적, 육체적 봉사를 위해서 가난한 이들의 종들이라 불리우는 ’사랑의 딸회’를 창설 함으로써 프란치스커 드 살레시오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던 계획을 완수하였습니다.

 

"그들의 수도원은 병실이고, 그들의 성당은 본당이며,그들의 봉쇄 구역은 도시의 시가지이다."

 

그는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고, 북아프리카의 크리스찬 노예 대속 운동을 펼쳤으며, 전쟁 희생자 구호소 등등을 통하여 인간의 고통과 비참을 경감시키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새로운 신학교를 세움으로써 사제 양성에 적극 지원하였으며, 해외 선교사 파견은 물론 또 영적인 저술을 남겼다.

그는 선교 사업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파리의 부유한 부인들을 모아서 여러 개의 병원을 세웠다. 또한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해 구호금을 모았고, 북아프리카에서는 1천 2백 명이 넘는 갤리선 노예들을 위해 그들의 몸값을 치렀다.

 

그는 당시 나태와 악습과 무지로 가득 찬 사제들을 위해 매우 열심히 피정을 지도했다.

그는 사제 양성의 개척자였으며 신학교 설립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빈첸시오는 아주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조차도 그것을 인정했다. 그는 만일 하느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는 ’딱딱하고 쌀쌀하며 거칠고 까다로운’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온화하고 애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었으며, 다른 이의 요구에 매우 민감했다.

귀족적이고도 충성스러운 성격을 지녔던 그는 인간의 고통과 비참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일생을 다 바친 것이며, 그러한 인간악을 유발하는 환경을 제거하였는데 적극성을 내보인 탁월한 인본주의 크리스챤이었다.

 

1660년 9월 27일 79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곁을 떠난 그는

1737년 6월 16일 교황 끌레멘스 12세에 의하여 성인품에 오르셨고,

1885년에는 교황 레오13세에 의해 모든 자선사업단체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들 단체 중에 특별한 것은 물론 1833년에 그의 찬미자 프레데릭 오자남에 의해 만들어진 "성빈첸시오 아 바울로회"이다.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 농부와 학자, 지성인과 소박한이등 하느님의 자녀들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가장 큰 관심은 가장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질병, 가난, 무지,또는 학대로 무기력하게 된 사람들-에 관한 것임에 틀림없다.

빈첸시오 아 바울로는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은 굶주림으로 죽음에 이르고 있고, 부자들의 부유한 생활은 더욱더 호화로워지는 반면에 육체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적합한 수호 성인이다.

 

빈센트 성인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스승이라고 가르치셨고, 이것이 존경심과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이유이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갈 때는 겸손과 소박과 사랑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빈센트 성인의 삶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끊임없는 회심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성인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사제로 활동하시면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들었고, 하느님 현존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며, 사람들의 영적, 물적 빈곤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를 통해 냉철한 현실참여의 영성을 사신 분입니다.

 

성인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보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았습니다.

또한 그 일들을 혼자서는 할 수 없었으므로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많은 평신도들과도 마음을 합하여 일하셨습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http://org.catholic.or.kr/ssvp)

 

1833년에 프레드릭 오자남에 의해 파리에서 창설된 국제적인 가톨릭 평신도 단체 이다. 성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며, 고통받고 있는 모든이들을 돕기 위해 정의와 사랑을 추구한다. 이것은 각 회원들의 직접적인 봉사로 행해진다.

 

평신도들의 형제, 자매적 단체로서 회원들은 곤경에 처해 있는 자기 이웃안에서 하느님을 섬김으로서, 그리스도 사랑을 증거한다. 세계 131개국에 590.000명 (파리 세계 총 이사회 2001년 9월 발) 에 달하는 남녀회원으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체이며 회원들은 매주 시간 을 할애하여 이웃을 도움으로서 주님의 증인이 되고 있다.

본회는 교황청의 인가와 교권으로서 운영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참아주어라.

또한 그들에게 자선을 하면서 미루지 말아라.

계명대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궁핍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아라.

형제나 친구를 위해서라면 손해를 봐도 좋다.

돈을 돌밑에 두어 썩혀 버리는 것보다

형제나 친구를 위하여 손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명령대로 네 재물을 써라.

그것이 황금보다도 너에게 더 유익하리라.

네 곳간을 적선으로 채워라.

그러면 네가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리라.

그것이 방패나 창보다도 더 강한 무기가 되어,

네가 원수와 싸울 때 네 편에서 서 주리라.(집회 29, 8-13)

성녀 루이제

1591. 8.12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

1633.11.29 빈센트 성인과 함께 사랑의 딸회 창립

1660. 3.15 선 종

1934. 3.11 시 성

1960. 2.10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크리스찬 사회사업가들의 주보 성녀로 선포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http://www.vincent.or.kr

성 빈센트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http://www.dcsvp.org

가타리나 라부레 C.Laboure 1876년축일:11월28일환시자.파리

(메달앞면:"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메달뒷면 : 십자가, "M"문자와 사랑의 심볼인 2개의 심장,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의 심볼인 열 두개의 별)

 

카타리나 라보레는 1806년 5월 2일, 프랑스 볼르강디(Burgundy) 지방의

Fainles-Moutiers라는 아름다운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행복한 11명의 가족들 가운데 9번째 아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영혼에게 어릴 적부터 시련의 징표를 보여주심으로써 선택된 영혼임을 알려주셨으니 그녀가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를 여의게 된 것입니다.

 

성녀 카타리나 라보레는 파리에 있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사랑의 딸회"에 입회함으로써 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 였습니다. 이곳에서 수련수녀로 있던 첫 달 동안, 그녀는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발현을 여러 차례 뵙는 은혜를 입게 되는데, 성모님께서는 성녀에게 "기적의 메달"이 만들어 지 도록 하라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카타리나 수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러한 성모님의 발현과 관련하여 철저한 침묵을 지켰으며, 성모님의 지시에 따라 그 사실을 그녀의 고백 신부님에게만 말했습니다.

 

46년 동안 성녀 카타리나는 그 메달을 통하여 일어난 불가사의와 기적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성모님 발현의 비밀을 신중하게 지키면서 평범한 소임을 겸손하게 수행하였고,특히 파리 교외의 Enghien에 수용된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1876년 12월 31일, 성녀 카타리나는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티없으신 여왕을 직접 뵈옵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녀의 시신은 57년이 지난 후에 발굴되는데 몸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때 2시간 이상이나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무릎에 자기 손을 얹어 놓는 특은을 누렸던 이 성녀에게 죽음조차도 경의를 표하였던 것입니다.

 

카타리나 수녀는 1947년 6월 27일, 교황 비오1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카타리나 수녀가 보여준 삶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위하여 평범한 소임을 잘 해냄으로써 성녀가 되신 분입니다.

’보통사람들의 성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성화의 비결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축일 : 1월 4일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e.ann seton

 

사랑의 씨튼 수녀회 http://www.seton.or.kr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성녀 루이즈드 마리약의 전통을 이어받아,

1809년 성녀 엘리사벳 씨튼께서 창설하신 미국최초의 방인 수녀회로서, 수녀원 확장으로 인해 1870년 독립된 활동수녀회입니다.

빈첸시오 성인이 실천했던 가난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육화의 영성과 그 전통을 이어받아, 당시 미국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활동 수도회로 성장하였다.

 

          

 

"당신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것 가운데서도 만족하게 살고자 애쓰시오."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하느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결정을 서둘러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의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충실히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으시오. 내가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마음이 바라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빈첸시오의 편지에서*

 

 

오, 구세주여,

당신은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적인 방법으로도 이 계명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모든 의미인 그런 신분으로, 거기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끊임없는 요구들을 내포하는 그런 소명으로 저를 불러 주셨으니 영원히 감사드릴 일입니다.

저에게 은총을 주시어 우리 공동체가 이웃을 섬기기를 일삼는 데에,

우리 누구나가 역경에 처한 이웃의 외침을 들으면 곧장 하던일을 팽개치고 나서는 데에 더불어 이바지하게 하소서.

*성 빈센트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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