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9월28일 성 벤체슬라오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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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09-27 ㅣ No.667

 

축일 : 9월 28일

성 벤체슬라오 Wenceslaus(907?-935?)

왕.순교자.(927,929년?)보헤미아.프라그.

 

보헤미아의 통치자 보리보이와 그의 아내 루드밀라의 개종은 그의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동시에 강력한 체크가는 이 신흥종교를 극구 반대하였다.

915년경, 보리보이의 아들 라티슬라브가 전국을 통치했고, 슬라브족인 벨레시안스의 딸 드라호미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형인 벤체슬라오는 907년경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며,볼레스슬라오는 동생이다.

 

성 벤체슬라오는 할머니 루드밀라의 배려로 성 메토디오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보데크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슬라브어를 익혔다. 루드밀라는 보헤미아의 통치자가 되도록 그를 격려하였고,그녀의 전속사제인 바오로 신부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920년 경,그가 어릴 때에 부친 라티슬라브가 마갸르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어머니는 크리스챤을 반대하는 듯한 정책을 펼쳤다. 이리하여 크리스챤적인 벤체슬라오와 그 어머니 사이의 대립은 격화된 것이다.반그리스도파를 옹호하던 그의 어머니는 성녀 루드밀라를 살해했던 반 크리스챤들과 더불어 드라호미라가 통치하면서 반그리스도교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녀는 곧 실권하고, 벤체슬라오가 922(925?)년경에 신권자가 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후 게르만의 왕 헨리꼬 1세가 지방 통치자 회의를 열였는데, 핸리꼬 외에는 대부분의 지방 왕들이 벤체슬라오의 신앙 때문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 비또를 모시는 성당을 프라그에 세웠고, 게르만과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이 정책이 귀족의 반발을 샀고, 따라서 도처에서 귀족들의 봉기가 있었던 것이다.그의 정책은 보헤미아의 종교적 오염을 멀리하고 비잔틴의 정치적 영향을 벗어나는 것임으로 많은 반대와 갈등을 빚었다.

 

벤체슬라오의 통치 기간 중 특징적인 것은 교회의 지지, 독일과의 평화협상,

반 그리스도교 파의 반대로 그를 괴롭협던 정치와 보헤미아 내부의 통일을 위한 그의 노력이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육성하고, 정의롭게 다스렸으며, 귀족들의 폭거를 타도하였다.

보헤미아의 성 벤체슬라오(929년)는 체코의 국가적, 종교적 영웅으로 공경받는데, 4년간의 짧은 통치기간 동안 그가 베푼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배려들이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만일 성인들의 생애가 ’초자연적으로’잘못 묘사되어 왔다면, 벤체슬라오의 일생은 그와는 대조적인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 그는 10세기의 보헤미아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음모 가운데서 그리스도교를 위해 싸웠다.

 

929년 9월(935년 9월?), 그는 동생 볼레슬라오의 초대를 받고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 축일을 지내려고 스트라(알트분글루)로 갔다.

볼레슬라프는 미사 도중에 자기 형인 벤체슬라오를 공격했고, 이 싸움에서 벤체슬라오는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축제일 저녁, 그가 위험에 처한 줄을 알았다. 그 다음날 그는 동생과 그 일파에 의하여 처형되었는데, 성당 문 앞에 쓰러지면서 이렇게 외쳤다:"동생아, 난 너를 용서한다."

그후 그는 즉시 순교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았고, 보헤미아 전 주민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비록 그의 죽음이 근본적으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벤체슬라오는 신앙을 위한 순교자로 찬미받았으며, 그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국민의 수호자이며,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의 수호자로 찬미받고 있다. 벤체슬라오, 순교자와 동일 인물인듯 하다.

 

’훌륭한 왕 벤체슬라오’는 정치적 불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우리가 간혹 다른 종류의 폭력에 희생자가 된다면 우리는 사회의 질서를 위한 그의 투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적 가치가 몹시 요청되고 있다.

 

"정치의 자치권을 인식하는 한, 정치 활동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따라 그들의 결정을 하도록 노력해야만 하며, 국민들에게 효과적이고 공평한 봉사를 함으로써 신앙의 성실함을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증거하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교황 바오로 6세, ’활동으로 부르심’ 46항)

 

옛 슬라브 전기에서

(Edit.M.Weingart,Pragae 1934,974-983)

 

가난한 이들을 진실되게 판단하시는 임금님의 옥좌는 영원토록 세워져 있으리라.

부친인 브라티슬라프가 세상을 떠난 후 보헤미아인들은 벤체슬라오를 왕으로 세웠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는 굳건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복음의 권고에 따라 모든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헐벗은 이들을 옷 입히며 굶주리는 이들을 먹이고 나그네들을 맞아들였다.

과부들의 권리가 손상되는 것을 용납치 않고 빈부의 차별없이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봉사자들을 도와주며 여러 성당들을 장식하여 주었다.

 

그러나 어떤 보헤미아인들은 오만해져 "당신의 형 벤체슬라오가 어머니와 자문관들과 공모하여 당신을 죽이려 하고 있소." 하고 말하며 그의 동생 볼레슬라프를 교사했다.

여러 도시에서 성당들의 수호 성인 축일을 지낼 때마다 벤체슬라오는 그 곳들을 방문하곤 했다. 한 번은 어느 주일날 고스마와 다미아노의 축일을 맞아 볼레슬라비아라는 도시에 갔다. 미사 참례 후 프라하로 돌아가려 했으나, 볼레슬라프는 악한 마음으로 "형님, 왜 우리를 떠나십니까?"하고 말하며 제지했다.

 

그 다음날 아침, 아침 기도 종이 울렸다. 그 종소리를 들을 때 벤체슬라오는 "주여, 오늘 아침까지 살게 해주심을 감사하나이다."하고 뇌이면서 일어나 아침 기도를 바치러 갔다.

이때 볼레슬라프는 즉시 뒤따라가 성당 문 앞에서 그를 붙잡았다. 벤체슬라오는 그를 바라보며 "너는 어제까지 나를 충실히 섬기지 않았니?" 하고 말했다. 그러나 볼레슬라프는 악마의 속삭임에 마음이 약해져 칼을 빼들며 "이제부터 더 잘 섬기고 싶소." 하고 대꾸했다.

이 말을 마치고는 칼로 형의 머리를 쳤다. 그러나 벤체슬라오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얘야, 이게 무슨 짓이니?" 그리고는 동생을 붙들어 땅에 넘어뜨렸다. 즉시 볼레슬라프의 부하 한사람이 달려와 벤체슬라오의 손을 내리치며 볼레슬라프를 도와주었다.

상처를 입은 벤체슬라오는 동생을 그대로 두고 성당으로 피신해 갔다.

그러나 두 악한들이 교회문간에서 그에게 치명상을 입히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이 달려와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벤체슬라오는 땅에 넘어져 "주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고 말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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