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9월30일 성예로니모 사제 학자 축일

인쇄

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09-30 ㅣ No.670

축일: 9월 30일

성예로니모 사제 St.Hieronymus C. et D. E(340,347년? -420년)학자.증거자.스트리돈

 

예로니모 성인은 뛰어난 성서학자이며 수덕가로서 서방교회의 4대 공교부 가운데 한 분이다.

(*4대 공교부: 암브로시오,아우구스티노,그레고리오,예로니모)

예로니모(에우세비오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는 340년(347년?)경에 지금의 북부 이탈리아 스트리도니아(달마시아의 아퀼레이야 근교 스트리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무척 부유하며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로마는 그 당시 콘스탄티노 대제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나서 겨우 40년이 지났을 무렵인데, 그 때의 습관을 따라 예로니모가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이미 장성한 후였다.

 

354년경 12살 때 로마에 가서 엘리오 도나토라는 유명한 학자에게서 수사학과 고전문학, 특히 치체로와 비질리오의 라틴어 고전문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라틴어와 희랍어 지식은 물론 고대사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로 명성을 날린 분이다

이때 그는 세속 학문에 전념하였지만, 주일에는 사도들과 여러 순교자들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며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5세(19세?)때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성사를 받고 프랑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리어에 정착한 다음 정부 관리로 일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자들의 반대 때문에 3년간(335-337년) 트리어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동방교회의 수도생활을 소개하였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트리어에 머무는 동안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370년에 고향인 아퀼리아에 돌아와 발레리아노 주교의 지도 아래 같은 뜻을 갖고 있던 친구 루피노, 보노소 크로마치오, 엘리오도로 등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힐라리오 등 위대한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교회와 융합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다음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주교에게서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후 그는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칼치스 사막에서 2년간(375-377년) 은수자들과 살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은수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치체로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꾸중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 이단 문제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379년(38세?)에 안티오키아에 가서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성 바올리노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바울리노를 지원하려는 목적에서 멜레시아노의 이단 논쟁에 개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서의 라틴어 번역에만 보냈으나, 그 당시에 있었던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 예컨데 오비니아의 성모 마리아 동정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하여도 그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던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와도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예로니모는 382년에는 바울리노와 성 에피파니오와 더불어 로마로 가 공의회에 참석하고, 자신은 교황 다마소의 비서로 계속 머물게 되었다.

 

이때 다마소 교황은 신.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교회 안에는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예로니모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하였던 것이다.

 

그는 4복음서와 성 바오로 편지 그리고 시편의 라틴어 사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헬비디우스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를 반박하며서"라는 글을 발표했다. 헬비디우스는 마리아가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로니모는 말첼라와 바올라 등을 주축으로 한 귀족 부인들을 권고하여 성서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또한 수많은 자신의 반대자를 상대로 하여 사제 독신제와 거룩한 생활을 역설하였다.

그러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적대자들이 여자들 집에 들락거리는 예로니모를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원자이던 다마소가 서거하자, 그의 반대자들과 또 나쁜 루머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는 동방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예로니모는 80세 가까이 된 다마소 교황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물망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384년에 그를 지원하던 다마소 교황이 사망하고 예상과는 달리 시리치오 교황이 선출되자 상황이 돌변하였다.

적대자들이 그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바울라와 에우스또치움 및 일단의 로마 그룹과 합류하여 이집트의 니트리아 사막의 은수자들을 방문한 다음 , 386년에 팔레스티나로 와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는데, 여기는 바울라가 여자 수도원 3곳과 남자 수도원 1곳을 세웠고, 예로니모가 남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또 그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하였다.

 

그의 생애 전반기는 종교적 체험과 고행 등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동서방의 긴 여행과 다마소 교황의 비서로 일했던 시기이다.

 

두번째 기간은 다마스의 서거 이후 성서 번역과 주석 작업에 열중하던 베들레헴 시절이다. 이 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빛난 업적을 남기는데 관상 생활과 성서 연구로 일관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후 그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간 저술과 번역 활동에 몰입하였다.

예로니모는 자신의 경험에서 혼자 수도에 힘쓰는 은수자 보다도 한 지도자 밑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서로 도와 주며 나아가는 것이 훨씬 수덕에 빠른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 친히 수사들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성당에 모여 성무 일도서를 같이 합송하고, 아침 미사에는 완덕에 관한 유익한 설교를 하고, 나머비 시간에는 적당히 노동에 종사하기로 했다.

또한 여가를 이용해 신·구약 성서의 사본을 작성케 하고 이를 사방에 보내주었다.

 

예로니모는 다시 신약·구약 양 성서를 쉽게 또한 정확하게 다시 번역할 것을 결심하고,우선 카르데아어(語)를 배우고 나서 386년부터 404년까지 끈기있게 집필을 계속해 드디어 위의 대사업을 완성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유명한 불가타(대중라틴말성서)역 성서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모든 교부의 저서나 성서의 각서에 대한 주석설명서도 저술하고, 바쁜 중에도 각 방면의 명사와 편지, 서신왕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이 외에도 예로니모에 관한 유명한 전설이 있다.

그것은 어느 날 한마리의 사자가 절룩거리며 그에게 가까이 와서 앞발을 내밀어 자세히 보니, 거기에 커다란 가시가 박혀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를 빼주니까 사자는 자못 기쁜듯이 갈기로 덮여진 머리를 성인의 몸에 비비고 그 후는 성인의 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예로니모가 사자와 같은 용기로써 교회를 위해 투쟁하고, 자신을 극기하고, 자기의 결점, 악습과 같은 가시를 제거하는데 끊임없이 노력한 사실을 상징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394년부터 그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와 서신 연락을 하면서 당시 교회의 큰 골칫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몰아내는 데 공동 보조를 맞추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사업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칭송하였다.

이같이 하느님께 위탁받은 사명을 완수한 예로니모는

420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78세였다. 그는 교회 박사로 공경을 받는다.

교회는 9월 30일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그를 ’신학교의 주보’ 또는 ’수덕생활의 주보’로 모신다.

 

그는 아마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분이었고,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예로니모는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으며, 밍네의 라틴 교부 총서(PL) 제22-30권에 그의 저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총서 한 권은 요즘의 400쪽으로 된 책 40-50권 분량이나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방대한 저서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들은 성서 주석서, 성서 번역서, 교의신학서, 이단 논쟁서, 수덕신학서, 역사서, 강론, 서간 등 다양하며, 저서 목록만 열거하더라도 엄청나게 많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오래 살기도 했지만, 수도원 안에서 학문 연구에 열정적으로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성화들이 많은데, 상체를 벗은 은수자의 모습으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가장 큰 성공은 390년에서 420년까지 이룩된 구약 성서 번역이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구약성서의 경우에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에서 번역하였다가 후에 히브리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신약성서의 번역도 이 동안에 완성된 것이다.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Vulgata.대중라틴말성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예로니모 당시가 아니라 훨씬 뒤인 13세기부터였다.

 

예로니모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트 공의회에 의하여 가톨릭의 공식 라틴어본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이 성서 번역으로 교회 내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그의 심원한 학식의 최대 결실이라 하겠다

그는 유명한 그리스 교부들의 성서 주석서들, 특히 오리게네스의 주석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교회에 소개하였다.

게다가 예로니모는 자신이 직접 구약성서의 창세기, 시편, 전도서, 모든 예언서,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서, 사도 바오로의 필립비서, 갈라디아서, 에페소서, 디도서 등에 대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405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서 주석서를 남겼고, 그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415년에는 뻬라지아노스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이듬해인 416년에 무장한 뻬라지아노스 수도자들이 베들레헴 수도원을 불태우고 그를 해치려 하였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 후 그는 병으로 인하여 베들레헴에서 운명하였다.

 

지금 그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성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예로니모는 처음에는 은유적 주석방법을 선호하였지만 점차 성서의 본문과 역사를 중시하는 문자적 주석방법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이처럼 주력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가 성인들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그들의 뛰어난 미덕이나 또는 그들이 실천한 헌신적인 봉사 등을 기억하지만, 예로니모는 그의 나쁜 성질 때문에 기억되고 있다.

 

그가 아주 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신랄한 비평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은 너무도 열렬했으며, 그에게 오류를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적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예로니모는 그의 강력하고도 때로는 풍자적인 글로써 그들을 공격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정신적 영감의 큰 근원이 된 주석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열심한 학생이었고 완벽한 학자, 비범한 서간문의 작가였으며, 수도자,주교,교황등의 상담자이기도 했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예로니모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일찍이 안 사람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어떤 현대 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예로니모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니모 이후 몇세기 동안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데 적격이었을 뿐이다."

 

트렌트 공의회는 새롭고 정확한 불가타 성서의 출판을 요구했으며, 그것이 교회에서 사용될 진정한 성서임을 공표했다.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는 스스로 훌륭한 준비를 했다.

그는 라틴어뿐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와 칼데아어까지 능통한 대가였다.

그는 신비주의자였으며, 기도,참회,연구에 자신을 맡기고자 칼키스 사막에서 5년을 보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믿어지는 동굴이 있는 베들레헴에 정착해서 살았다.

 

예로니모는 강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덕성과 더불어 대담 무쌍한 비평가가 지닌 단점과 인간이 지니는 일상적인 윤리 문제를 가진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는 덕이나 악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든 중간 입장을 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빨리 화를 내는 반면 빨리 후회하는 성격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더 가혹했다.

 

돌로 가슴을 치는 예로니모의 초상화를 보면서 한 교황이 말하기를 "당신이 그 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 하신 일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교회가 결코 당신을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버틀러, ’성인전’)

 

 

성 예로니모 사제의「이사야서 주해 서문」에서

(Nn.1.2: CCL 73,1-3)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처럼 "너희는 성서를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는 성서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성서를 파고들어라." 그리고 "찾으라. 얻을것이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명에 순종할 때,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처럼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권능이시고 하느님의 지혜이시라면 성서를 모르는 이는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창고에서 새 것과 옛것을 끄집어 내는 집 주인을 본받고 싶으며, 또 아가에게 "아, 임이여, 햇것도 해묵은 것도 임을 기다리며 마련해 두었답니다."고 말하는 그 신부를 본받고 싶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예언자 이사야를 예언자로서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자요 사도로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다음 말씀을 자기 자신과 다른 복음 전파자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그리고 하느님께서 흡사 사도에게 말씀하시듯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하고 물어보시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그러나 내가 몇 마디 말로 주님의 모든 신비를 포함하는 이 성경 책의 내용을 다 취급하려 한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사실 이사야서에서는 주님이 동정녀에서 탄생하신 임마누엘로, 여러 놀라운 일들과 기적들을 행하시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분으로, 그리고 만백성의 구세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물리, 도덕, 논리에 대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성서 전체에 나오는 모든 것과 인간의 혀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인간의 이해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 말씀에서 이 신비들의 깊이를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계시되었지만, 그것은 밀봉된 책에 쓰여진 말씀과 같다. 글 아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책이 밀봉되었는데 어떻게 읽겠느냐?’고 할것이다.

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나는 글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증명이 만일 어떤 이에게 너무 빈약하게 보인다면 사도 바울로의 다음 말씀을 들으십시오.

 

"두세 명의 예언자들만 말하도록 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곁에 앉은 사람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경우에는 먼저 말하던 사람은 중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침묵을 지키건 말을 하건 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영께 의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침묵을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예언자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의 뜻을 깨닫고 있다면, 만사는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귀에는 자신들이 하는 말소리의 진동만이 가 닿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언자들은 다음 말씀으로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 천사가 내 안에서 말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마음 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의 말씀을 내 듣고 싶사옵니다.

 

 



237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