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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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26 ㅣ No.974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다른 학생들은 한 창 시험 공부를 하는 유월말에 철민은 뜨거운 햇살 아래서 한

창 투구 연습이다.

"그거 뭔데 몸에다 막 쳐 바르는 거야?"

"이거요? 썬 블록 크림이요. 내 피부가 자꾸 까맣게 타잖아요."

철민은 공을 던지고 난 뒤 잠시 쉬는 틈을 타 노출 된 피부에다 크림을 막 발랐

다. 그걸 보고 투수 코치가 한 말씀 한 것이다.

"벌써 겉 멋이 들은거야?"

"주위에서 자주 제게 운동선수 같단 말을 한단 말이에요."

"너 운동 선수 맞잖아."

"제가 운동한 과정이 선수들과는 다른 케이스잖아요. 내가 운동하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너 집에서 야구 하는 줄 모르냐?"

"네."

"우리 학교도 제법 공부 잘하는 녀석들이 오는 곳이지.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

다. 집에 떳떳하게 네가 야구 선수란 걸 말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자."

"네. 코치님?"

"왜?"

"내가 야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을까요? 괜한 짓 하는 거 아니지요?"

"내가 장담하지. 넌 분명 우리나라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다."

 

철민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제 어느 덧 자신의 길에 대한 가닥을 잡아 가

는 모습이다. 던지는 공은 직구 밖에 없었지만 연습하는 모습은 어느 투수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철민은 처음으로 현주를 먼저 찾아 갔다. 일반 학생들은 시험이 끝이 났지만 자

신은 곧 있을 야구 대회로 한창 바쁠 때였다. 현주가 조금 느긋할 것이라 생각하

고 힘든 시간을 쪼개어 세울대를 방문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현주가 다니는 학

교의 위용에 기가 죽었을 터이지만 철민은 이제 완전히 자기가 야구 선수라 생각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철민은 현주에게 전화를 했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철민은 현주에게 그 전화 한

통 한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만나자는 의사를 확인 받았

다. 현주가 자기 학교로 찾아 오라는 말을 했다.

""애들이 생긴것도 부실하고 별 거 없네.""

철민은 세울대의 학생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주를 만나고 나서

는 다소 기가 죽었다. 현주는 전혀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 티가 나지 않았고, 피

부는 따가운 여름 햇살을 외면한 채 하얗고 고왔다. 모교인 최고 명문대 안에서

자연스러운 현주를 보면서 자신은 외부인이라는 생각으로 주위에 있는 학생들이

다시 높아 보였다. 철민은 현주를 만나 그늘이 좋은 벤취에 앉았다. 방학이 시

작 되었지만 학생들은 평상시처럼 많았다.

"미안해, 학교로 찾아 오라고 해서. 오늘 잠시 학교에 볼 일이 있었어."

"그래 나는 괜찮아."

"열심히 하고 있지?"

"응."

"너는 방학인데 집에 안 내려 갈거니?"

"우리는 방학이 없어. 곧 대회가 있잖아. 겨울방학이나 되어야 집에 내려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지윤이는 자주 보니?"

"요즘은 한동안 못 봤어."

"너 야구 하는 거 지윤이에게는 말해도 되지 않니?"

"안돼!"

"지윤이가 너 많이 변한 거 같다고 걱정하더라. 지윤이가 너 야구 하는 걸 알

면 네게 힘이 될텐데..."

"내가 조금 더 완숙해 지면 그때 말하지 뭐. 걔가 내가 야구 하는 걸 알면 어

떤 반응을 보일까? 너하고는 좀 틀릴 것 같아. 운동 선수라 싫어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흐음..."

"왜 웃어?"

"그냥. 나보다 네가 더 지윤이를 잘 알겠지?"

"무슨 말인데?"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지만 지윤이는 아닌 것 같거든."

"응?"

"아니야. 나중에라도 지윤이에게는 네가 야구하는 사실을 알려 줘."

"그,그래."

"내가 너를 학교로 부른 것은 울 오빠가 너 좀 보재."

"왜? 저 번에 공 맞은 것 때문에?"

"아니야. 내가 그때 공 던진 선수가 내 친구라고 하니까 한 번 만나고 싶대. 내

가 울 오빠를 많이 약 올렸거든. 울 오빠 이제 곧 졸업 할 텐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약을 올렸지."

"무슨 약을 올렸는데?"

"오빠는 기량이 안되니까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그랬지. 너하고 비교를 좀 하면

서 약을 올렸지. 집에서는 방학 때 오빠랑 같이 내려 오라고 그러는데, 오빠는

야구 연습하느라 안 내려 갈거래."

"오빠가 어디 있는데?"

"운동장에서 야구 연습 하고 있을 걸. 졸업한 선배 중에 공 잘 던졌던 사람이

있나 봐. 타격 연습한대."

"나보고 거기 가자구?"

"응."

"저번에 나 너네 학교 선수에게 맞았어. 나 거기 갔다가 몰매 맞으라구?"

"괜찮아. 혹시 그러면 내가 말려 줄게."

 

철민은 현주를 따라 순수 아마추어 팀인 세울대 야구부가 훈련하는 곳을 찾아

갔다. 일반인이 본다면 갖가지 늘여 놓은 야구 도구들과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로 제법 그럴 듯해 보였으나, 정식으로 훈련을 받고 있던

철민의 눈에는 왠지 산만하고 허술해 보였다.

"오빠!"

현주는 자신의 오빠를 찾았다. 현주의 오빠는 타석 옆에 서서 한창 후배들에게

타격 연습을 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현주의 오빠는 제법 얼굴이 탄 것이 운동선

수 다운 모습을 보였으나 방금 막 타격 연습을 한 학생은 그렇지 못했다.

"여긴 왜 왔어."

현주의 오빠는 현주에게 그말을 해 주고는 현주 옆에 있던 철민이를 꼬아 보았

다. 철민의 근골은 여기 있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유난히 다부져 보였다. 180 가

까이 되는 현주 오빠였지만 철민이를 올려다 봐야 했다.

"오빠, 내 친구 데려 왔어."

"누군데?"

"안녕하세요.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누구신데요?"

"오빠 내가 말하던 그 친구야."

"한량대 야구 선수?"

"응."

철민이는 현주 오빠의 눈치를 살폈다. 근처에 놓여 있던 야구 방망이들이 불안

해 보였다.

현주 오빠는 철민이를 쏘아 보며 물었다.

"네가 시험 쳐서 대학 들어 갔다가 야구부에 스카웃 됐다는 그 학생이냐?"

"그런 셈인데요."

철민이가 현주 오빠의 표정에 약간 겁을 먹고 대답을 했다. 철민이의 대답을 듣

자 마자 현주 오빠의 표정이 바로 순한 양처럼 변하더니

"부럽다 임마."

라는 말을 했다.

그때 부터 현주의 오빠는 철민의 공에 맞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철민에

게 친한 척 했다. 자신도 이 학교만 아니었으면 정식으로 야구부에 들어가 야구

선수가 됐을텐데 하는 말을 하며 비리비리한 학생들로 야구부를 지탱하자니 많

이 힘들다는 말을 했다. 일학년일 때는 많은 학생들이 야구부를 지원해 오는데

오래 버티는 놈이 없다며 야구부에 대한 어려움도 표하고 정식 야구대회에 나가

면 수도 없이 패했지만 그래도 타학교 일반 동아리 팀들로 구성된 야구 대회에서

는 자기 팀이 무적이라는 말로 자부심도 피력했다. 철민은 현주를 만나러 온 것

인데 현주 오빠 때문에 현주와는 별 얘기를 하지 못했다.

현주의 오빠는 철민을 자기 야구 부원들에게 일일이 소개를 시켜 주었다.

"이 분은 우리 야구팀 역사상 방어율이 가장 좋았던 분이야. 졸업한 지 사년이

넘었는데 아직 야구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지. 이 형은 거의 야구 선수 수준

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

현주가 아까 말한 그 사람인가 보다. 철민은 현주 오빠의 말을 들으며 그 사람

이 던지는 모습을 봤다. 그 사람을 대하는 타자들은 연신 헛 방망이 질이었다.

"진짜 저 형 야구 했으면 잘 했을 것 같지 않냐?"

철민은 자기 팀의 잘 던지는 투수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렇게 잘 던지

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철민은 그 사람이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간과

했다.

"모르겠는데요."

철민은 생각없이 내뱉았는데 현주의 오빠는 그렇지 못했다. 자기 야구부에서 가

장 공을 잘 던졌다는 그 사람에 대한 자부심이 현주 오빠에게는 남달리 컸었다.

"저 형이 투수로 있을 때 우리 야구부가 대학 강호였던 딴국대에게 5점차로 진

적이 있어. 저 형이 정식 야구 선수는 아니지만 아직 너 보다는 잘 던질 거다."

철민도 기분이 나빴다. 제법 이름 난 자기 학교의 투수 코치가 자기 보고 울 나

라 최고의 투수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해 준게 엊그제였다. 제대로 된 코치하나 없

는 이런 어중간한 팀의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투수보다 뜨거운 햇 빛 아래서

죽어라 훈련한 자기가 더 못하다는 말에 열을 받았다.

"제가 한 번 던져 볼까요?"

 

철민은 그날 현주와의 데이트를 꿈 꾸고 간 것이었는데 옷이 온통 땀으로 젖고

는 도망을 쳐야 했다.

철민의 공은 현주 오빠가 추켜 세운 그 사람의 공과 비교가 되질 않았다.

현주 오빠가 추켜 세운 그 사람은 제법 다양한 구질의 공을 던졌으나 직구만 던

진 철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철민은 이제 제법 포수 미트로 공을 던졌다. 하

지만 철민의 공을 제대로 잡을 만한 포수가 세울대 야구부에는 없었다. 현주 오

빠가 추켜 세운 사람의 공이 종이 비행기라면 철민의 공은 에프15 제트기였다.

철민이 던진 공에 손을 댄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공이 무서워 모두들 뒤로 물

러나기 일수였다. 보다 못한 현주 오빠가 타석에 들어 섰다가 또 허벅지에 공을

맞았다. 철민은 분위기를 잠시 살피다가 전에 자신의 면상에 주먹질을 한 녀석

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도망을 쳤다.

너무 아프면 입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는 법이다. 현주 오빠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굴렀다. 현주가 걱정스럽게 자신의 오빠를 달래고 있을 때 철민

은 도망을 쳤다.

"현주야, 너네 오빠한테는 진짜 미안하다.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해 주라.

다음에 연락할게."

 

철민은 자신이 먼저 연락하고 만난 현주와의 첫 만남을 망친 것에 마음이 편하

지 못했다. 철민은 다음 날 잠이 들기 전 현주에게 전화를 했다.

"현주니?"

"응."

"니네 오빠는?"

"괜찮아. 오빠가 운동을 하면서 좋아 진게 있다면 아주 튼튼해 졌다는 거야. 너

무 신경 쓰지마."

"그러니?"

"오히려 고맙다."

"뭐가?"

"울 오빠가 심한 자괴감에 빠졌어. 정식 야구 선수와의 거리감을 느낀 것이지.

이제 함부로 자신이 야구에 소질을 타고 났다. 훈련만 제대로 받으면 일류 선수

가 될거다라는 말은 못 할거야."

"미안하다."

"아니야. 울 오빠랑 내일 집에 내려 갈거야. 갔다 와서 보자."

"그래. 잘 자라."

"응, 안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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