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남들은 나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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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5-07 ㅣ No.4826

 

남들이 나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남겨두고 가는 것은 함께

나눈 추억과 그의 빈자리에 놓일 영정입니다.

고인의 빈소 앞에는 실오라기 같은 가는 향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뒤에는 살아 생전 행복해하던 환한

그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얼굴을 마주하며 고인과

함께 한 추억을 떠올립니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이 부디

이승보다 편한 곳이기를 바라면서...

경북 영주의 철도청 기관사인 최윤식 님(49세)은 6년 전

부터 노인들에게 영정을 선물해 오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도 많고, 그래서 하나라도 더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거리는

많고 많지만 하필 왜 그 중에서도 영정이었을까요?

그에게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어머

니가 돌아가신 7년 전, 그 어이없고 가슴 아리던 기억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정정한 노인이던 어머니를 갑자기 세상에서

거둬 가게 만든 것은 교통사고.

그래서 갑작스럽던 어머니의 부고는 얼마 안 남은 칠순

잔치를 준비하던 그를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빈소에 놓을 변변한 사린 한 장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 지갑에서 꺼낸 신분증 사진으로 빈소

의 영정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떠나신 것만 해도 기가 막힌데, 굳은 표정

의 흐릿한 어머니 사진을 보며 며칠 밤을 지새운 그의

마음은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아버지는 사진사였고,

고 또한 어려서부터 배워 온 사진 기술로 아마추어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오랫동안 죄스러움과 회한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다가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같은 아픔을 다른 사람이 맛보지

않도록 해야 겠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그의

손은 이미 카메라 장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비번인 날에는 어김없이 시골을 돌아다니며

노인들의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 칠순 잔치를 위해 모아 둔

그 돈으로 말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노인들에게

선물한 사진이 벌써 3000개가 넘어서 처음 자금은

바닥난 지 오래지만 그는 자신의 봉급을 쪼개 가면

서까지 이 일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오늘은 영주시 평은면의 한 시골 마을 노인들의

사진을 찍으러 가는 중입니다.

아침부터 마을 이장님의 안내 방송이 있었지만

사실 노인들은 며칠 전부터 오늘을 기다려 왔습니다.

언제나 동행하는 그의 아내는 노인들 얼굴에 화장을

해주고 남편이 사진을 찍는 동안 반사판으로 빛을

조절하는 일을 맡습니다.

이들 부부는 사진 한 장 없는 시골 노인들에게 이렇

게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어 드릴 때마다 뿌듯한

보람을 느낍니다.

완성된 영정을 전달하러 이들 부부가 다시 마을에

들어가는 날,

마을 노인정에서는 잔치 준비가 한창입니다.

노인들은 사진 찍던 날보다 더 곱게 차려 입고

잔칫상 앞에 앉아 그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드디어 부부가 도착하자 노인들 모두 일어나 반갑게

맞아 줍니다.

이제 그토록 기다리던 사진을 받는 시간입니다.

모두가 두 손으로 액자를 기쁘고 감격스럽게 받아

서는 그 속의 사진이 닳도록 보고 또 봅니다.

언젠가 세상을 떠나도 오래 자식들 곁에 남을 영정.

그래서 노인들은 미리 묫자리 봐 두고 온 것처럼

든든해하고 즐거워합니다.

"사진이 참 잘 나왔네. 나는 인물이 없는데 실물보다

훨씬 잘 나왔어. 정말 고마워."

노인들의 웃음소리를 귓등에 매달고 그는 다시 자신

의 일터로 돌아갑니다. 그의 본업은 떠나고 보내는

일에 익숙한 직업.

그는 열차가 역에 닿을 때마다 바삐 오가는 수많은

사람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서, 그 자신만은 여유

있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풍부한 표정을 잃지 않으려

애씁니다.

영주에서 동해까지 왕복 운행을 다녀온 늦은 밤에도,

집에 들어온 그는 고단함도 잊어버리고 아직 현상하

지 않은 필름 들을 형광등 불빛아래 펼칩니다.

그리고 찍은 사진 중에서 가장 잘 나온 것을 고르느

라 필름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고민합니다.

침침한 형광등 탓에 눈이 뻑뻑해 오지만 사진 한 장

도 그냥 봐 넘길 수 없습니다.

그의 바람은 떠난 이와 남은 이 모두에게 살아서

좋던 날들이 오래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찍은 영정을 장수 사진이라 부르는 최윤식 님.

그는 그가 한 분 한 분 찍어 드린 사진의 주인공들이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떠나는 날, 사진 속의 환한 표정처럼 좋은

추억을 더 많이 간직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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