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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추기경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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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행을생각하는모임 [ros] 쪽지 캡슐

2001-04-21 ㅣ No.3364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지나간 것’에 하고픈 이야기

 

 

 

"자네는 평생에 크게 두 번 실수를 했네.

 

주교 임명을 받았을 때와 서울대주교 임명을 받았을 때 그것을 덥석 받아들인 거야,"나에게 이 말을 가끔 생각해야 할 만큼 후회가 있었다고 묻는다면....

 

 

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사람들은 나보고 인중이 길어서 오래 살 것이라고 합니다만, 일흔 일곱이고 보니 해거름에 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루에 비기면 석양입니다. 나는 석양을 좋아합니다.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 좋고, 무언지 모르게 내 마음을 아득히 먼 무엇인가로 향하게 하는 데서 석양은 마음의 고향처럼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나의 인생은 그렇게 고향 길 가까이 와 있습니다. 걸어온 과거를 돌이켜 보면, 사람들은 아마도 내게는 자랑할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뉘우치고 통회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주교로 살아온 33년뿐 아니라 성직 생활 48년을 돌이켜 볼 때 후회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물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나는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나서 수난하시는 주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주님이 "시몬아, 너는 나를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너는 오늘 새벽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씩이나 배반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르면서 주님을 배반한 것이 너무 후회스러워 통절하게 울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주님을 거스려 지은 죄를 참으로 그렇게 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성령쇄신 기도회에서는 다른 은사(恩賜)보다도 ’눈물의 은사’를 주십사 하고 기도한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조금 받은 것 같지만 아직 내 마음은 돌처럼 굳어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신부님이 강론에서, 사도 바오로가 교회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일치를 위해 투쟁한 것,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을 흘린 것,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고 온갖 고통을 참아 받은 것, 순교자 정신으로 산 것 등을 말씀하였을 때, 나는 나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였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한 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2디모 4,7)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도저히 같은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는 말씀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사오나, 우리 교회를 위해 또 우리 나라를 위해, 통일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즉 제가 희생이 되어서 통일이 되고, 우리 겨레가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고, 우리 교회가 복음화 된다면 저를 바칠 마음의 뜻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런 고통을 당하면 마음이 흔들릴지 모르오니, 제가 끝까지 항구하도록 주님이 잡아 주십시오!"

 

 

 

부끄럽지만, 나는 인생과 사제생활을 통틀어 보속(補贖)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사도 바오로가 어떤 의미로 당신 자신을 "나는 죄인들 중의 죄인이다"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나에게는 그대로 맞는 말입니다.

 

 

 

10여 년 전,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던 고 장병화 주교님에게 문병을 갔을 때였습니다. 말씀을 못하시는 상태였으나 문병을 드리는 나에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 병은 너무 중하여 이제 나는 세상을 더 살 수 없고 죽어 천당에 가야 해!’ 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내게는 하늘을 가르키며 이젠 천국에 갈 것이라고 하시는 그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만일 이렇게 중병을 앓고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주교님처럼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하늘을 가르키며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솔직히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며 천국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살아온 사람, 사도 바오로처럼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자부하면서 정의의 월계관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나는 가끔 평화를 위해 일하였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되돌아 보면,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일은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위한 기도’에서 보듯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는 모두 평화의 일이요. 곧 사랑의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고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존재를 평소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들인데도 그 존재를 평소에는 의식조차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의 불행, 고통에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서를 보면, 그리스도는 그들과 일체화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사제입니다. 사제 중에서도 지위로 보아서 가장 그리스도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마음쯤은 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은 웬일일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을 때 가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의 위치가 너무나 이 사람들과 멀다. 혹시 의무감이나 체면상 또는 우연한 기회나 공식 스케줄에 의해서 이런 사람들을 대하는 때가 간혹 있어도 결국은 너무 멀다고 말입니다. 물론 내가 좀더 노력하면 이 거리를 좁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좀더 노력하면 이 거리를 좁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교’ 또는 ’추기경’하면 한 단체의 장이요 불가피하다 할지라도 이것은 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고달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주 기초적인 의식주 해결을 하기 위한 고통, 자녀들을 기르고 교육시키는 데서 오는 부모님들의 고통을 모릅니다. 이것도 제도에서 오는 문제, 즉 독신 생활을 하다 보니 일반 사람들의 생활고를 모르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신 생활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봉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독신 생활이 문제라면, 그것은 내가 잘못 살기 때문이지 제 뜻대로 올바로 살면 가난한 사람들과의 거리를 멀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결핍이었을 것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도 있듯이, 가난과 사람의 처지를 압니다. 나는 아무리 따져 보아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 않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모릅니다. 그들의 아픔을 모릅니다. 사람은 남의 아픔을 볼 때, 그리고 뼈저리게 그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만 비로소 그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고인이 된 마더 데레사 수녀는 "참된 사랑은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픔이 없으면 고통받는 사랑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가난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들의 연민이나 값싼 동정, 자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런 나의 반성은 우리 교회도 같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우리들, 특히 성직자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본시 대부분은 가난한 집안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이후에 가난을 차차 잊게 되었습니다. 가난하지 않은 데서 그들 속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모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픔이 없으니 사랑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존재와 고통을 머리로는 인식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한 지역 교회의 목자로 있는 사람으로서 추기경이면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심을 본받아 남을 받아주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자신을 비우면서 주고 또 줄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끊임없이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여 왔습니다. 외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으로는 벌써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성질이 어떻고, 저 사람은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등 이런저런 레테르를 붙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고 변덕스럽고 약합니다. 진정으로 한 인간을 어떤 처지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언젠가 미사 중에 옆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방귀 냄새인지, 몸에서 나는 것인지, 아주 견디기 힘든 냄새였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내가 이 사람과 만일 한 방을 쓰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면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사람은 냄새 하나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 그만큼 인간에 대한 나의 사랑이란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나 자신이 이런 냄새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리라고 무엇으로 장담할 수 있는가?

 

나도 지금보다 더 늙어서 볼품없이 될 날이 있는 것입니다. 또 나이가들면 들수록 사람의 마음은 약하고 노여움을 타기 쉽습니다. 이런 심리가 이미 내 안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가끔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직은 ’추기경님! 추기경님!’ 하며 거부보다는 사랑과 존경을 더 받는데도 말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지난 30여 년 간의 격동기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한 사제로서 어떻게 시대를 느끼고 처신하며 살아왔는지, 또 어떤 희로 애락과 고뇌를 겪었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마음을 고백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되돌아 보면, 긴터널을 지나온 것 같기도 하고 공도 보람도 있었겠지만, 과오도 범하고 비판과 반대 앞에 홀로 서 있어야 하는 고독한 시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간 동안, 1979년 1월에는 나름대로 주님의 사제로서 충실하게 살아보려고 성 이냐시오 영성(靈性)에 따른 한 달 피정도 해보고,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도 했으나, 차츰 식어져 오늘에 와서는 다시 도루묵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나고 지금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 나서야 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어떤 심판을 받을지 두렵기도 합니다만, 이제 더욱 더 그리스도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깊이 깨닫게도 됩니다.

 

 

 

 

 

 

 

참으로 어두웠던 그 시절

 

 

 

 

 

흔히 1961년 5.16 쿠데타부터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30여 년을 ’군사정권 시대’라고 말합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시대였지만, 오늘까지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남아있을 만큼 독재정권의 압제가 격심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나라가 빈곤을 극복하고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치뤄야했던 부득이한 희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인한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막강한 권력에 의한 통제된 분위기 속에 강요된 희생이었고, 많은 경우에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당하고 불법적이기까지 한 인권유린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국민의 참여 의욕은 오히려 감소되고, 특히 인권유린과 사회정의 부재는 너무나 많은 이의 삶을 고통 속에 좌절하게 했고 정경유착으로 말미암은 권력형 부정부패를 만연시켰습니다. 그 결과, 외화내빈(外華內貧)과 물신주의(物神主義)의 전도된 가치관으로 인간과 정치, 경제뿐 아니라 교육계,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근복적으로 타락시키는 병균을 오늘까지도 지니고 살게 되었습니다.

 

 

 

인권과 사회정의 문제는 70년대부터 1987년 6.29선언까지 20여 년 동안이 가장 심각했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는 시인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과 ’비어(蜚語)’가 잘 말해 줍니다. ’오적’은 1970년 「사상계」에 게재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김지하는 이로써 구속되었고 몇 달 후에 보석되긴 하였으나, 이 시를 실었던 「사상계」는 폐간되었습니다. ’비어’는 가톨릭이 발간하는 월간지 「창조」1972년 4월호에 실렸고, 이로써 김지하는 수배되었다가 디시 구속되고 「창조」는 얼마 후 휴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당시는 언론자유가 극도가 제한되었고 언론계와 학원, 노동계와 종교계가 정보사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당국, 특히 중앙정보부에 의해 임의연행되어 감옥살이까지 하는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1970년 10월에 있었던 노동자 전태일 군의 분신자살 사건은 이 시대 노동자들의 처우가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노동 3권이 얼마다 침해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1974년 1월부터는 대통령 긴급조치령의 발동으로 힘의 통치, 공포통치가 더욱 자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무릎을 꿇고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꼿꼿이 서서 항거함으로써 퇴학, 퇴직, 또는 구속으로 옥살이 또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삶과 죽음 중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공포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저항하는 인권 수호와 사회정의를 외치는 소리가 대학, 언론계, 노동계와 재야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교회도 그냥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대체로 전통을 존중하는 편이고 현실정치에의 참여는 극히 제한된 예외의 경우 외에는 피하는 보수적인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인권과 사회정의 구현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예민한 사회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언한 것은 1967년 강화도 심도(沈都)직물 사건 때였습니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노동운동 탄압으로 야기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교구 주교였던 나는 가톨릭노동청년회 지도주교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현장에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억압받고 부당해고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교회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와 함께 주교회의에 건의했고, 주교회의는 1968년 2월 9일자로 공식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인권 신장, 권익 옹호를 위해 발표한 최초의 성명서로서, 한국 천주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문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표 썼다가 찢기를 몇 번

 

 

 

 

 

1971년 10월에는 원주교구에서 교구장 지학순 주교를 비롯하여 교구사제 전원이 여러 날에 걸친 현실 분석 끝에 부정부패를 규탄한다는 시위를 했는데, 이것 역시 한국 천주교회로서는 과거에 생각할 수 없던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그 해, 나는 성탄미사 강론을 통하여, 또 1972년 8월 15일에는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여 일인독재 체제를 굳혀 가고 있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는 성모병원이 세무사찰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 ’유신’이 선포되기 직전인 1972년 10월 14일, 로마회의 참석자 출국하는 나에게 중앙정보부는 출국을 확인하고 감시하기 위함인지 요원을시켜 가방을 비행기 안까지 날라다 주는 등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그후 로마나 기타 가는 곳마다 대사관 요원들이 친절하게 마중 나와 주기도 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인권과 사회정의 구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지학순 주교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면서부터 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 시대와 그 후에도 사회정의 구현에 있어서 때로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고도 볼 수 있는 정의구현사제단이 뜻있는 사제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고, 많은 사건이나 문제에 사제단이 함께 하면서 이른바 ’시국기도회’도 자주 개최되었습니다. 또 여러 경우에 내가 부득이 강론을 할 수밖에 없어서, 어떤 이들에게는 가톨릭 교회가 인권과 정의구현, 우리 나라 민주화의 구심점처럼 비춰지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가톨릭 농민운동도 농민의 권익 옹호를 위해 어려움 속에서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전남 함평 고구마 사건에 이어, 1979년에는 오원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안동교구 영양군 춘기면의 가톨릭농민회 지부장이던 오원춘이란 농부가 당국에 의해 납치를 당한 사건이었는데, 그 납치의 진실 여부를 두고 교회와 정부와의 긴장관계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오원춘 사건이 일어난 천주교 안동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두봉 주교는 추방될 위험에 있었습니다. 또 전주교구의 김재덕 주교는 전주에서 있은 기도회 중에 ’현 정권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주장하여 당국으로부터 즉시 입건되었고 구속될 위험에 놓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두 경우 모두 당시 주교회의 의장인 광주교구 윤공희 대주교와 내가 관여할 수밖에 없었는데, 두봉 주교를 위해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불리움을 받아 소상히 설명을 드림으로써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때 로마는 우리 정부로부터 두봉 주교의 교구장직 해임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김재덕 주교의 경우에는 전주까지 가서 함께 상경하여 대책을 숙의했는데, 우리는 김재덕 주교가 구속되었을 때 강력히 대처하겠다는 각오로 임하였습니다. 우리의 이런 자세를 알게 된 당국은 김재덕 주교를 구속할 경우, 명실공히 교회와의 정면대결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그것은 정부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구속 방침을 취소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1987년 6.10 때는 정부 고위관리가 농성 중인 학생들을 구금 또는 해산시키기 위해 공권력 투입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내게 전하려 왔을 때, 그렇게 한다면 맨 먼저 내가 거기 있을 것이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 때문에 공권력 투입이 철회되고 수일 후 학생들은 무사히 자진해산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건과 사태를 겪는 와중에서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어떤 심경이었는지를 표현하기란 정말 힘듭니다. 참으로 단순하지 않았고, 어찌할 바 모를 암담한 때고 적지 않았지만, 정부나 교회 밖으로부터의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도 적지 않은 반대와 비판의 화살 앞에 서 있어야만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이렇게 깊은 정치 문제에 개입하느냐?’ ’이로써 교회가 입는 손해는 얼마나 크며, 정부 공직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고충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예수님과 복음을 빙자하여 말하지 마라!’등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분들도 교회를 걱정한 데서 이런 비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너무나 괴로웠고 두려움 속에 고독한 때가 많았습니다. 사실 내 고향이 대구인데, 대구는 ’TK의 아성’ 때문인지, 그곳에서 잘 알고 지내던 이들까지도 저를 보는 눈이 물론 곱지 않았고, 그 때문에 고향인 대구가 마음으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원상으로 돌아갔습니다만, 당시에는 외람된 표현이지만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끔 생각하였습니다. 한때는 사표를 내려고 몇 번이고 교황님께 드리는 편지를 쓰다가는 찢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5.18 때 혼자 항의성명 낼 생각도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었을 때, 한국 교회로서 처음 당하는 충격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의견 차이 없이 모두 함께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 주교가 ’양심선언’을 하고 다시 강경으로 선회하면서 정의구형사제단이 생기고 이분들의 거의 모든 시국사건에 개입될 수밖에 없었을 때, 그들에 대한 찬반 의견이 교회 밖에서도 적지 않았으나 내부에서도 상층부에서부터 심각하게 갈라졌습니다.

 

 

 

때로는 갈등이 심화되어 서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참여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 모든 일의 탓이 일차적으로 교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나를 고발하는 편지를 많은 이들의 이름으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정부 당국에서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나에 대한 견제, 또는 그 이상에의 것을 상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들은 로마에서 내가 알려주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 구국사제단, 평신도 공화당원으로 이루어진 ’대건회’가 있었는데, 국제문학교류협력회라는 단체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자 되는 사람을 초대하여 그로 하여금 내가 ’권력욕과 허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라는 글을 유럽 신문에 싣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지학순 주교가 투옥될 때에는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하고 그날 저녁으로 풀려났는데, 며칠 후 당국이 다시 가택연금 아래 두었고, 이것이 이분을 자극하였습니다. 당시 어떤 젊은 변호사가 이분을 좀 부추겨서 국사재판을 거부하고 ’양심선언’을 발표하여 정면 대결할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 주교로부터 이 문제를 상의 받고는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변호사가 지 주교를 ’민주화의 투사’로 내세워야겠다는 생각에서인지 정면대결을 강력히 권하는 바람에 지 주교는 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본인의 수감은 물론, 교회 안팎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어 자제하여 줄 것을 요청하다가(그럴 때, 중앙정보부에서 어떻게 나올지, 그들은 두뇌와 조직 모든 것을 동원하여 교회를 괴롭힐 텐데 우리는 가진 것이라고는 양심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다가)결국 "양심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보다 더 괴로웠던 시간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입니다. 가장 괴로웠고 분노도 많이 느꼈습니다. 유혈을 막기 위해 전두환씨, 교황 대사를 만나고, 주한 미대사, 위컴 사령관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담배를 피우니까 교황대사도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초조한 끝에 끊었던 담배를 피울 정도였고, 집에 오니까 12시가 넘었습니다. 그 이튿날도 계엄사령관 이희성씨를 비롯해서 글라이스틴씨도 만났습니다. 광주교구의 윤공희 대주교와도 서신을 왕래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혹간 5.18 때 왜 강력히 대처하지 않았느냐 하는 판의 소리를 합니다. 사실 그때는 굉장히 고민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 허정, 함석헌, 천관우씨 등 사회 원로들과 함께 군부에 항의하는 성명서라도 내자고 뜻을 모아 보려 했으나 윤보선씨와는 어떤일도 함께 할 수 없다는 허정씨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다른 이들도 되도록 군부를 직접 자극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합의를 보고 발표한 성명서는 되도록 국가적 파탄이 오지 않도록 쌍방의 자제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나마 언론에서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이 독자적으로 강경한 항의성명도 생각했었는데, 자칫 성난 젊은 학생, 노동자들을 충동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그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유혈사태까지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어 몇 번 기안 하다가도 버렸습니다.

 

 

 

광주는 민주화운동이 강제진압 당하고 4~5일 후에야 겨우 가 볼수 있었습니다. 2~3일간 머물면서 나름대로 사람들을 만났는데, 군과 관의 대표들은 스스로 찾아와서 각기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였지만 거의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찾아오거나 내가 찾아 나서서 만났습니다. 주로 교회 신자들이었지만 윤공희 대주교와 사제단, 수도자, 평신도 등 여러 층을 만났습니다.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한마디로 지금도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한(恨), 바로 그것입니다. 그날 광주의 젊은이들이 외친 것이 있다면 오직 이 땅의 민주화와 인간다운 삶을 부르짖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나라의 실권을 잡은 일부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피를 흘리고 생명까지 빼앗겼으며 광주 시민 전부가 수일간 마치 적 치하에 점령된 듯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무원의 상태와 공포 아래 있었습니다. 이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따라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악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날을 슬픔과 분노 없이는 기를 수 없습니다. 절대로 이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칠수는 없습니다.

 

 

 

당시 누군가 말하기를, 고아주의 아픔이 잊혀지지 위해서는 적어도 1세기는 걸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광주는 참으로 우리 민족의 가슴에 너무나 깊게 패인 상처입니다. 진실의 빛 아래, 이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한 이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로 지탱해 온 30년 세월

 

 

 

 

 

이처럼 격동의 30여 년 동안, 안팎으로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압력과 비판 아래 한 인간으로서 내가 겪어야 했던 심적 고층은 지금 표현하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경우, 소수이지만 이해하는 이들도 있고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아는 하느님 앞에서 기도로 지탱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9년 1월에는 한달 피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 자신이 내면의 이야기입니다만,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에게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여야 합니까?’ 하는 기도를 자주 바치기도 했고, 이제 더 이상 정치적 문제 때문에 기도회나 강론을 하는 일이 없을만큼 사회가 빨리 민주화되기를 갈망하는 마음도, 그래서 좀 쉬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유난히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정치 문제에 개입하게 된 것이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개인으로서는 참으로 70~80년대는 너무나 긴 터널이었습니다. 나뿐 아니라 국민 다수에게도 생각하는 지성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암울한 시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는 억압 속에 묶인 시대였습니다. 이런 때에 사제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침묵을 지킬수 있습니까?

 

오늘에 와서 그 시대에 행한 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길게 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 자주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교회(사제)는 참으로 이런 시대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또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뿐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었는데

 

 

 

 

 

 

 

18년 전인가,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님으로 51년 간 이 땅에서 일하다가 선종(善終)한 기후고 신부님을 병 문안했을 때였습니다. 신부님을 간호해 드리고 있었던 한 자매님이 옷장에서 신부님이 평소에 입고 있던 메리야스 내복 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입을 수 없을 만큼 낡은 것이었습니다. 구멍이 여러 군데 나 있었고, 신부님이 직접 했는지 엉성하게 꿰맨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옷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적 청빈이 살아 있는 표본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 나라의 어느 신부님들도 그런 헐고 낡은 속옷을 입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부님에게는 그것이 몸에 배인 가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남긴 재산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으면서 가끔 나의 신앙 스타일이 과연 복음적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복음적이 아닐 뿐 아니라 그것에서 아주 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주 복음적 청빈을 설교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설교 주제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 자신을 그것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바리사이임을 가끔 느낍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을 때때로 합니다. 그들을 방문하는 것도 드물기는 하지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생활을 나누지는 않습니다. 나는 가끔 생각했습니다. 주교관을 떠나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 수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 생각은 신부일 때 강하게 가졌던 생각인데, 오늘까지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난한 동네에 들어가면 주교이기 때문에 혼자 살 수는 없고 누군가 함께 사는 사람, 적어도 비서 신부가 있어야 하고 식복사도 필요할 것이고, 연락을 위해 전화도 필요하고, 교구 내 여러 업무를 위해 사람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면 차도 필요하고 집도 커야 하고 그곳이 곧 주교관이 되고 맙니다. 결국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과 삶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다시 현재와 같은 추기경이 되고 맙니다.

 

 

 

나는 가끔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큰 차이, 더 나아가 패러독스가 있음을 느낍니다. 뿐더러 이것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추기경의 모습인가 생각해 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은 평범한 신부 때 굉장히 강하게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가톨릭신문 전신인 가톨릭시보 사장신부로 있으면서 대구 희망원이란 곳에서 살고 싶은 열망을 아주 강하게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온갖 종류의 인생의 마지막에 속하는 사람들, 즉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행려자, 폐병 말기 환자, 맹인 등의 사람들을 대구시에서 모아 놓은 곳이었습니다. 이름은 ’희망원’이었지만 그곳에 가보면 ’절망원’입니다.

 

 

 

나는 한때 그곳을 드나들면서 그분들과 같이 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과연 그곳에 가서, 그 나쁜 조건 속에서 내가 함께 살 수 있겠는가를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마산교구 주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교가 되면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기 어려운 위치가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 꿈은 갖고 있었습니다.

 

 

 

서울교구장으로 와서도 그 꿈은 간직하고 있었고, 서울에 있는 산동네 같은 데 가서 그들과 한번 살아볼 수 있을까 하는 꿈을 나름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 여건도 있겠습니다만, 나 자신 안에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의미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낮추어 사람이 되어 오시기까지 하였는데, 나는 나 자신의 모든것을 버리지 못하고 그냥 마음만 때때로 가지고 오락가락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그런 곳에 가보는 것도 아주 드물어졌습니다. 예수회의 어느 신부님이 경기도 시흥 신천리에 철거민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복음자리를 짓고 내 방까지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나는 생각은 있으면서도 그곳에 가지 못한 것은 그곳에서 살 때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생활불편, 특히 화장실을 공동으로 써야 하는 문제 등을 생각해서 낮에는 여러 번 갔지만 한 번도 자고 오지는 못하였습니다.

 

 

 

몇 년 전, 평화시장에 있는 준본당을 사목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청계천과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신자들을 사목하는 것이 이곳 신부의 사명인데, 신부님과 신자들이 나를 시장 안으로 인도하여 이리저리 어지럽게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반시간 남짓 끌고 다니는데, 내 나이에 정신이 어리둥절할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좁은 공간에서 먹고 살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분들, 그 안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고초도 짐작되었습니다. 공기는 탁하고 건강은 어떠할지 염려되고 화재의 위험도 아주 염려되었습니다. 내가 그 신부님이 살고 있는 방에서 생각한 것 중 하나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면 한 달 안에 병이 나서 죽을 것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해도 말뿐이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가난한 이들과 같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만큼 내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도 없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도 인내도 없으며 겸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나는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위선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만나고 싶은 욕심

 

 

 

 

 

 

 

오래 전, 어떤 잡지에서 읽은 지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명상 속에 지옥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어둡고 캄캄한 벽을 향해서 고민에 빠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보았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답하기를.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해서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 이름만 알면 우리가 여기서 해방될 터인데...."

 

"아니, 그 사람이 누구인데 그럽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약2천년 전에 유대 나라 예루살렘 어느 언덕에서 두 강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사람인데, 그 이름을 모릅니다. 세상에 살때에는 이름을 알았는데... 그 사람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그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지옥을 구경하게 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아, 그 이름이야 쉽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지옥에 있는 사람은 "네? 네? 뭐라고요?" 하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더랍니다. 귀가 좀 먹었나 해서 크게 "예수 그리스도!" 하고 소리를 쳤으나 그래도 못 알아듣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은 다 알아듣는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리만 전혀 통하지 않더랍니다. 결국 그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에 깊은 명상에서 깨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 공부의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는 책을 보니, 그 첫머리에 "인생에 있어서 내가 배운것은 오직 하나, 곧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것도 오직 하나, 곧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참으로 사랑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고 값지고 삶을 풀성하게 해주며 구원해 주는 것이 있다면 사랑이라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날 내가 살던 방을 떠난다고 할 때, 무엇인가 갖고 떠난다면 어느 것을 가지고 떠날 것인가? 깊이, 그리고 오래 생각해 본 것은 아니지만 한결같이 생각나는 것은 성경책 하나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책, 옷, 전축, 텔레비전, 라디오, 심지어 패물이라면 패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물론 이것을 가리켜 청빈(淸貧)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청빈 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애착을 느낄 만큼 무엇과도 친숙해지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이것은 물건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사람에 대해서도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청빈은 사랑하면서도 끊을 수 있을 때에 가장 잘 드러납니다. 물건 같으면 애착을 느끼면서도 깨끗이 버릴 수 있을 때 청빈이 증거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애착이나 사랑이 없어서 오는 담담함입니다.

 

 

 

그럼 성경을 왜 가져가고 싶으냐? 성경에는 어떤 애착이 있습니다. 아직도 하느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 그분의 생명과 사랑이 담긴 성경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을 읽음으로써 그분과 더 가까이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더 알고 싶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습니다. 신학이란 학문으로가 아니라 생활한 체험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기적 같은 것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 깊이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삶도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에, 한 달 간 피정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 온 예수회 신부님이 인사차 찾아왔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피정 이야기가 나왔고, 그 신부님은 일본의 어느 주교님과 한 달 피정을 같이 했다면서 은근히 나한테 권하는 투였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한 달이 길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내심 깊이에는 주님을 곧바로 본다면 큰일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신부님 표현에 의하면, 한 달 간 피정을 하면 믿음을 잃는다고 합니다. 주님을 보다시피 체험하는 것이므로 믿는다는 말이 적합치 않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런 주님과의 만남을 한편으로는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생활과 존재에 너무 깊숙이 들어오시는 것이 두렵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 "생명의 말씀을 지닌 주님을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장담하면서도 결국은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사도 베드로와 흡사합니다. 결국 나는 사랑하면서도 막상 사랑의 증거가 필요할 때에는 저버리는 약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사람들에 대해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사람들 중에서도 사랑하기 곤란한 사람들, 거지, 병신, 천덕꾸러기 등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참으로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사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말로써 또는 체면상, 형식상 사랑할 따름입니다. 이런 내가 사랑과 평화를 차별과 멸시와 미움, 다툼과 전쟁의 세상에 선포할 수 있습니까?

 

아무튼, 나는 그 다음 해인 1979년에 성 이냐시오의 영성 수련에 따른 한 달 피정을 하였습니다. 수원 ’말씀의 집’에서의 한 달 피정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무척 좋았습니다. 한 달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루 4~5시간씩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이 미사나 신부님과의 면담, 개인묵상, 식사, 점심 후 한 시간 산책 등으로 쉽지 않게 느낄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잘 안 되었습니다. 지루한 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주일이 지나고 2주째가 되면서 자기 숨소리도 잘 안 들릴 만큼 기도속에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피정하는 동안에 나한테 가장 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는 예수님을 보았느냐?’라는 문제를 수없이 던져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렇지 않아도 검은 얼굴이 더욱 깜해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점심식사 후면 한 시간씩 뒷산을 한바퀴 도는 산책길에 나서곤 하였는데, 하루는 때마침 눈이 내려 하얗게 덮인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예수를 아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혼자 산책하는 것을 보고 평소 잘 아는, 마치 딸이 아버지 대하는 마음으로 가까웠던 한 수녀가 뒤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뒤따라오는 줄 몰랐다가 산중턱에서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고는 그 수녀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기도에 방해된다고 생각해서 "왜 따라오는 거야?" 하고 꾸중하였습니다. 그때 내 얼굴은 아마 ’예수를 아느냐?’하는 문제 때문에 까맣게 되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수녀는 내 말을 받아서 "그렇게 얼굴이 까매지도록 고민할 바에야 피정을 왜 하세요? 피정이 고민하는 것인가요"라고 약간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 반드시 고민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은총을 기다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래도 일선신부 시절이 그립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귀 한 마리가 임금님을 모시고 가는데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함성을 지르는 것을 보고는 자기를 크게 환영하는 것으로 착각해서 환호에 답한다고 앞발을 들어올리다가 그만 임금님을 떨어뜨려 하인으로부터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넨 평생 두 번 실수했네!

 

 

 

 

 

나는 그렇습니다. 어디를 가나 많은 사람들이 환영합니다. 그럴 때면 그 나귀처럼 내가 잘나서 그런 줄로 착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환영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김수환’에서 그리스도를 빼고 나면 ’영(零)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일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늘 무엇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48년간의 사제생활을 돌이켜 보고 성찰하여 볼 때 주님의 사제로서 일편단심 그리스도만을 따르면서 살아왔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사제가 된 것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직분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던 때가 없었는가 생각해 보면, 인간이므로 없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고민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 친구가 "자네는 평생에 크게 두 번 실수를 했네. 주교 임명을 받았을 때와 서울대주교 임명을 받았을 때 그것을 덥석 받아들인 거야!" 라고 말했는데, 나는 이 말을 가끔 생각해야 할 만큼 후회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왜 신부가 되었느냐?"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본래 사제 되기를 스스로 원해서 신학교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라 "너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신학교에 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형(고 김동한 신부)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어머니가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습니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심 것 같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형과 내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습니다. 형은 이듬해에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초등부5~6학년)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입니다.

 

 

 

열세 살에 신학교로 가서 1951년 사제서품을 받을 때까지 18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 세월 동안 나는 사제 성소(聖召)에 대해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몇 차례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서 규칙을 고의로 거스리기도 하여 꾀병을 내서 한 학기를 쉬기도 했었습니다. 또 사제 성소를 앞두고 상담도 몇 차례 하고 ’9일 기도’도 바치는 등 참으로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안팎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세 신부님에게 상의드렸었는데, 세 분 모두 "너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답이었습니다.

 

 

 

학병(學兵)을 지원한 것도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어느 친구와 같이 피할 길을 여러모로 모색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계시는 형제들이 지속적인 감시와 독촉을 받고 있고, 매일 형사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교회의 장상(長 上)으로부터 지원하라는 공문이 와서 할 수 없이 지원하였습니다.

 

 

 

당시 이 땅의 젊은이들이라면 그 누구나 민족의 적인 일본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특히 전쟁터에 가면 죽기 십상인데, 죽음의 의미를 찾지 못한 가운데 주음 터에 가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모두가 고민했고, 나라 잃은 젊은이로서의 고뇌가 컸습니다.

 

 

 

학병으로 끌려간 젊은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찾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일본군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들로부터 배운 군사훈련을 통해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할 날에 대비하자. 중국에 보내진다면 탈출할 기회를 만들어 그곳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독립군에 가담하자’는 생각을 많은 이들이 품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고 장준하 선생 같은 이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는 중국으로 파견되지 않고 동경 아래에 있는 오가사하라(小笠原諸島)하고 하는 곳에 가게 되어 본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학병 친구 몇 사람과 같이 미군이 점령한 유황도(硫黃島)로 도망치려고 장기간 계획을 세우고, 한 번은 실천에 옮겨 배를 탔는데 갑자기 미국 비행기가 공습해 와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학병에서 돌아와서는 부산 범일동 보좌신부로 계신 형님에게 가서 여러 달 지냈습니다. 본당신부님이 경영하는 보육원과 관계되는 일, 미군들이 주는 구호물자 일로 신부님과 함께 미국 군종신부를 만나러 갈 때 통역을 해준다든지 하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을 때에는 대구 계산동성당 제대 앞에 엎드려 하느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보통 사람들과 같은 인생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게 그 길을 보여주시지 않고 사제의 길만을 보여주시니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부복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아직도 가슴에 남은 건 열정뿐

 

 

 

 

 

나는 일선신부 생활을 불과 2년 반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추억에 남는 것은 그 시절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 당시에 사귄 사람들과는 오늘까지 만나면 누구보다도 반가워할 만큼 다정스럽습니다.

 

 

 

독일에 유학 가서 공부하고, 가톨릭시보 사장으로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교로서의 생활인데, 마산에서 2년, 서울에서 30년의 생활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가는 곳마다 꽃다발을 받고 환영도 받습니다만, 인간으로서나 사제로서 정다운 추억으로 남을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곤란합니다. 사실 서울에서 31년째 살지만 인간관계, 친분면에서 불모지대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단 한 집이라도 내가 부담감 없이 언제나 생각날 때 들릴 수 있는 집이 있느냐 하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정말 ’머리 둘 곳도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나는 사제로서 제일 좋아하는 삶은 일선 본당신부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젊기도 했지만 정말 몸과 마음을 다 바치다시피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고해성사를 비롯한 성사, 예비자와 신자 교리교육에 헌신했었습니다. 그것이 원칙이었고 성사를 거행하면서 신경질은 절대로 안 내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 사람들에게는 좋은 본당신부로서의 인상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1951년 신부가 되고서 그날로 공석중이던 안동(목성동)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었습니다. 물론 나는 사제가 되었으니 착한 목자로서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신자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6.25동란중이었고 안동은 다시 수복되었지만 전화(戰禍)로 말미암아 제대로 남은 집보다 불타버린 집이 더 많았습니다. 게다가 흉년이 심하여 안동 읍내에도 가난한 집의 생계는 곤란했고 시골 농촌은 명실공히 초근목피로 연명해 갔습니다.

 

 

 

그때, 나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부족한 영어 실력이지만 딱한 사정을 영문으로 써서 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으로 계시 안 제오르지오 주교님을 찾아 부산으로 갔습니다. 주교님을 뵙지는 못했으나 마침 우리나라를 방문한 주일 교황대사 필스텐벨그 대주교님을 뵙고 편지를 보이며 말씀드렸더니, 다음 날 안 주교님을 꼭 만나고 가라고 당부하시더군요.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안 주교님은 제게 2천만 원의 수표를 주시고 대구 최덕홍 주교님에게 보내는 편지도 함께 주셨습니다. 나는 돈과 편지를 최 주교님에게 드리고 주교님으로부터 다시 얻어 가져가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2천만 원은 너무 많아서 혼자 갖고 갈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 중에서 한 3백만 정도 주시면 얻어갈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교님은 나한테 얼마를 가져갈 생각이냐고 되려 물으셨습니다. 주시는 대로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1천만 원이면 되겠느냐?" 라고 하시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라,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만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래층에 계시던 당시 당가(當家)신부였던 장병화 신부님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장 신부님 역시 교구에 돈이 없는 차에 내가 2천만원을 얻어 와서 그 반을 가져가도 1천만 원은 교구에 남을 것이니 얼마나 졸은 일이냐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주교님이 들어와서 나에게 "김 신부, 원하면 그 돈을 다 가져가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2천만 원을 다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그 말뜻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주교님이 장병화 신부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거듭하시는 것을 보고는 ’안 주교님이 최 주교님에게 쓴 편지 내용이 무엇일까? 아마도 돈을 전액 김신부에게 주라고 하셨는가 보다. 주교님에게는 보고 겸 말씀드리라는 것이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 신부님의 완강한 반대도 있었지만, 교구 사정 또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라 처음 말씀대로 반만 갖고 왔습니다.

 

 

 

돌아와서는 그 돈으로 안동 시대 교우들을 대상으로 본당에 필요한 수리나 기타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었습니다. 시골 공소 교우들은 생활 형편이 더 어려웠기 때문에 교적에 적힌 식구들과 농사짓는 형편에 따라서 분배에 관한 잡음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 고해소(告解所)에서 나누어주며 "누구에게도 돈을 받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래서인지 공소의 거의 모든 교우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지만 일체 잡음이 나지 않았습니다.

 

 

 

 

 

 

 

젊은 가정부 안된다는 원칙

 

 

 

 

 

본당에는 전임 신부님이 떠나실 때 교우들과 마음이 상한 관계로 살림살이 일체를 가져가시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걸상도 책상도 없고, 식당에는 솥이나 그릇, 빗자루도 없었습니다. 집만 덩그러니 있었을 뿐 비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밥을 해먹을 도리가 없는지라. 처음 두 달 동안은 고아원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그 고아원은 본래 제천에 있었는데, 대구로 피난가면서 제천 가까이 있기 위해 안동성당 건물을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물론 돈은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 달쯤 지나자 이젠 더 할 수 없다고 통고를 해와서, 부득이 그날 저녁부터 신자들 집에서 식기와 수저를 얻고 밥솥, 냄비는 사서 밥을 해먹었습니다. 동정녀 한 분이 있어서 며칠 해주셨는데, 그분도 오래 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결국 가정부는 반드시 현재에 가서 그곳 신자들이 추천해 주는 사람을 쓰지, 결코 다니지 말자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데리고 다니는 경우 신자들 사이에 잡음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어머니께서 늘 젊은 여자를 가정부로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연령이 45세 이상 되는 분으로 정하였습니다. 당시 엄 회장이라는 분이 본당 회장이었는데, 그 분을 보고 이런 원칙을 말씀드리면서 가정부 한 분을 구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엄 회장님이 고심 끝에 구해 온 분은 이제 겨우 25세 정도밖에 안 되는 젊은 여자였습니다. 엄 회장님에게 젊은 여자는 안 된다고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회장님은 "아무리 사람을 구해 보아도 마리아밖에 없습니다. 아무개 할머니는 스스로 원하지만 안 됩니다. 또 누구도 있지만 그분도 이런 저런 사정상 안 됩니다"하며 마리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도 지키고 싶던 원칙이 처음부터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도 지키고 싶던 원칙이 처음부터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참으로 별 것 아닌 고민이었지만, 그때로서는 참으로 곤혹스러웠던 일이었습니다.

 

 

 

일선신부 시절을 되돌아 보면서 또 하나 느껴지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준비하는 것은 기도하고 하느님이 함께 해주셔야 성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동에 있을 때, 근처 예천 본당에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신부님이 비슷한 시기에 부임하여 일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 신부님도 열심히 일했는데, 그 신부님이 나보다 훨씬 전교를 잘하였습니다. 영세자가 수적으로 나보다 더 많았고, 특히 그 지역의 유지들을 거의 다 영세시켰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신학교에서는 그 신부님이 나보다 공부도 말도 못했는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그분이 더 나았습니다. 언변이 좋고 지식이 많다고 성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아주 깊이 깨달았습니다.

 

 

 

 

 

 

 

 

 

대통령과의 대화

 

 

 

 

 

 

 

그 동안 여러 대통령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만 가장 뜻깊은 만남은 1974년 7월 지금은 고인이 된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의해 구금되었을 때였습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고 김재규씨가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제의했는데, 나는 주교회의를 소집해서 주교님들과 상의하여 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교회의에 물었더니 찬반이 꼭 반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장이었던 내가 면담 제의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태하고 청와대에 가서 박 대통령과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할 사람?

 

 

 

 

 

한 시간 반 정도 의견을 나누었는데, 박 대통령과의 몇 차례 만남에서 유일하게 대화다운 대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 대통령과는 이보다 앞서 청와대 식사 초대로 한 번 만났고,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초대되어 기차로 진해까지 간 것이 두 번이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만, 그 어느 때이고 대화다운 대화는 없었습니다.

 

 

 

1972년 봄, 진해에 갔을 때에는 기차 안과 진해 공관에서 함께 식사하는 등 무려 11시간 마주 앉아 있었지만, 내게 말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고 혼자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기회를 주면 내 생각을 말씀 드리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취소하고 ’오늘은 듣자. 그리고 이분이 어떤 분인지, 성격과 통치이념이 무엇인지 들어보자’는 생각에서 듣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태도, 경제 발전 구상, 그리고 그때 막 시작한 새마을운동, 4대강 개발계획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분이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즉 장기집권하리라는 것을 나름대로 강하게 느낄수 있었습니다.

 

 

 

마침 식목일 다음 날이었는데, 헐벗은 산에 대한 이분의 남다른 관심, 또 기차역을 지날 때마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전지(剪枝)된 데 대한 강한 반응을 보고는, 좋게 말해서 우국지사이고 이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까지 관심을 쏟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모든것을 자신이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집착이 강한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를 이룩하기까지 물러날 분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다음 날 나는 혼자 서울로 올라오면서 매우 우울하였습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었을 때의 만남은 박 대통령이 시국에 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나는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경청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문제로 삼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즉, 종교 또는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냐? 언론 자유와 노동 문제에 교회가 왜 관여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가톨릭교회에는 노동청년회가 있었고, 개신교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는데, 통칭으로 ’도산(都産)’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산’이 노동 문제에 개입하면 그 기업은 도산(都産)한다고 하여 도시산업 선교활동을 비난하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정치, 경제 문제도 윤리도덕의 범주

 

 

 

 

 

박 대통령은 먼저 종교 또는 교회의 역할을 말하면서, 종교란 마음을 순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지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는 뜻의 말씀을 하였습니다. 정치, 경제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종교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고 정교분리 원칙에도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은 사실 그 시대에 교회 안팎에서 계속적으로 제기된 근본 문제였습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종교의 역할을 그렇게 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 안에서 신자들 중에는 물론이요 나와 같은 성직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는데, 신자가 아닌 대통령이 그렇게 보는 것은 이해할 뿐 아니라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한 번 달리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종교나 교회에 대해서 첫째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종교나 교회는 그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다해 줄 것을 바라고 있고 개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어둠도 밝혀 줌으로써 사회를 도덕과 윤리로 정화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사회가 윤리도덕으로 타락하고 부정부패로 썩어 가고 있는데도 교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다면 직무유기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도 되어야 하고 그것의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치, 경제도 포함되지 않은 수 없습니다. 국민 생활의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정치와 경제와 윤리 도덕의 범주 밖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도 대통령이 지적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교회도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정부의 인사나 경제정책 등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 성직자가 정치활동을 직접 하거나 정부 정책과 인사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인간의 기본권리를 유린한다든지 정의에 어긋난다든지 할 때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있고 또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교회에도 나름대로 복음정신에 입각한 인간관, 사회관, 국가관,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존재입니다. 이 존엄성은 국가의 권력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뿐더러 나라의 정치는 이 인간이 개개인으로 또는 가정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공동체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인간으로서 충분히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정치의 원리입니다."

 

다음은 언론자유와 관련된 정부의 언론정책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분은 당시 서울에서 인쇄되는 일간신문이 그날로 평양에 간다면서 남북 분단과 공산주의 혁명 침투의 위험 등에 비추어 볼 때 국가 안보의 절대적인 요청에 따라 현재의 언론 정책은 불가피한 것이고, 여기에 비추어 언론자유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나 역시 일간신문이 그날로 평양에 간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되묻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대통령이 보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동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한 국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강한 국력이란 무력에 의존된 것이 아니고 모든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과 국민의 단결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무기가 있고 잘 훈련된 군대가 있어도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신뢰는 신문을 믿을 수 있을 때 가능하고, 그것은 언론자유가 있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오늘날 국민은 모든 신문을, 시시비비를 잘 가릴 줄 아는 신문이라고 알려진 동아일보까지 서울신문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신문을 믿지 않는 것은 신문이 써야 할 것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고, 그만큼 언론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문을 믿지 않는 것은 곧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그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정부를 믿지 않을 때,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는 없고 국력을 그만큼 약화됩니다. 따라서 언론자유를 권력의 힘으로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안보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봅니다. 대통령은 이것이 우리 나라 실정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노동자 편을 드십시오

 

 

 

 

 

다음은 노동문제였습니다. 대통령은 종교계가 왜 노동문제에 개입하느냐, ’도산(都産)이 개입하면 도산(倒産)된다’고 기업에서 말하고 있는데, 사실 그렇다면서 여러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통령이 걱정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삼는 것은 결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노사관계는 이해관계 때문에 서로 맞서기 쉽습니다. 한쪽은 되도록 헐한 임금이기를 바라고, 다른 한쪽은 적어도 최저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은 물론, 한푼이라도 더 받고 싶으니 이해관계가 상반되어 갈등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문제를 대화로 푸는 노사화합입니다. 노사간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깊은 만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기업은 노동자 없이 안 되고, 노동자는 기업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로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아직 실업자가 많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사를 당하고 사용주 임의로 해고될 수도 있는 등 전혀 보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질은 공장에 들어가면 좋은 상품이 되어 나오는데 사람이 공장에 들어가면 폐품이 되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노동 현장의 현실이어서 노사간에는 잦은 갈등과 분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대립 상황에서는 힘이 센 편이 결국 이기기 마련인데, 그것은 언제나 사용주입니다. 왜냐하면, 사용주는 본래 개개인 노동자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강자인데, 거기다 중앙정보부, 경찰, 심지어 노동자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만들어진 노동청까지 기업주 편입니다. 노동자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통령은 2년 전 나를 진해 여행에 초대하였을 때, 고향 구미를 지나면서 옛날 가난한 시절에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고무신이 닳을까봐 신지 않고 들고서 철도 길을 따라 통학했다는 회고담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자란 분이었기에 5.16 군사혁명을 일으켰을 때에는 이 땅에 가난을 없애겠다는 빈곤 퇴치의 결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을 지닌 대통령이 노사분규 현장에 나간다면 나는 반드시 노동자 편을 들고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는 것은 바로 대통령이 해야 할 그 일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화하였습니다. 그밖에 지학순 주교를 그날 밤으로 석방시켜 줄 것과, 당시 보통군법회의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언도를 받은 이철씨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학생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그날 저녁 석방되어 내가 직접 중앙정보부에 가서 모시고 왔고, 이철씨와 다른 학생들은 며칠 후 국방부장관 이름으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습니다.

 

 

 

이 만남은 그간 여러 대통령과의 만남 중에서 가장 뜻깊은 것이었고, 그분에게 드린 말씀은 나 자신의 생각일 뿐 아니라 당시 교회의 뜻있는 분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본정신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태우 대표와의 위커힐 만남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만남은 노태우 대통령이 여당 대표로 있으면서 선언했던 ’6.29선언’이 있기 한 해 전인 1986년 11월 14일이었습니다. 워커힐 사파이어라는 곳에서 2시간 가까이 단둘이서 식사하며 건강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시국 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표는 학생들의 좌경화 또는 용공화 경향을 염려하고 엄히 다스려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뜻으로 일본, 싱가포르, 독일의 예를 들어 말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영국이 공산주의자들을 엄히 다스렸기에 공산주의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는데, 미군정은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허락했기에 그것이 남로당 조직이 되고 급기야 6.25남침을 가져오게 했다면서 장황하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 학생들의 좌경화는 염려되는 일이지만 그것을 현재와 같이 강경 수단으로만 다룬다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이나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공산주의를 지니고 있으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수 있을 만큼 공정했고, 또 발전과 함께 빈부의 격차도 적어졌으며,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기본인권이 존중되고 언론자유 등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계속 추구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어떠한가?

 

 

 

제5공화국이 들어서고 정의사회 구형이라는 슬로건이 파출소마다 붙어 있고 그것을 내세웠지만 그 때문에 정의가 더 구현되었다고 보는가? 심지어 대통령 주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말들이 많이 나도는데 그것은 다 유언비어라고만 볼 수는 없지 않는가? 게다가 사회풍조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현상을 빚어내고, 잘 사는 사람은 온갖 사치를 다하는 반면에 못 사는 사람은 상계동의 철거민 경우처럼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동안 참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신장해 왔다고 보는가? 민주화의 의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지금 모든 것이 위축되는 매일매일 구속, 단속, 엄단 등 무시무시한 분위기이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정의감에 불타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단, 그렇더라도 나 역시 그들이 용공으로 흐르는 데는 참으로 우려치 않을 수 없으나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정치는 공정하고 정의에 바탕을 두며 정치하는 이들이 참으로 사리사욕을 떠나야하고, 조금이라도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로 나가고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개헌 이야기도 나왔는데, 노 대표는 정부의 개헌 의지를 의심치 말도록 당부했지만, 나는 ’그렇다면 의심치 않도록 민주화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 당신이 바로 민주화에 있어서 백지에서 출발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느 날 백지는커녕 어디서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 내각책임제안이 나오지 않았나?’ 라고 하였습니다.

 

 

 

대화 도중에 다시 좌경화 문제가 나왔는데, 이때 나는 학생들의 좌경화의 근원에는 사회경제의 부조리도 큰 원인이지만 군사정권이 들어선 것도 원인이라는 점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국민의 마음이 지금 너무나 얼어붙어 있는데 이것을 녹여야 한다고 말했고, 참으로 사심 없는 정치와 민주화로 확실히 간다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습니다.

 

 

 

책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지은이(엮은이):김수환(신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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