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잊을 수 없는 사람(무소유 - 18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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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4 ㅣ No.12410

수연(水然) 스님!
그는 정다운 도반이요. 선지식이었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입으로 말하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 준 그런 사람이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그는 사소한 일로써 나를 감동케 했다.
 
수연 스님!
그는 말이 없었다.
항시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였다.
그러한 그를 1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다.
 
1959년 겨울,
나는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혼자 안거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래야 삼동(三冬) 안거 중에 먹을 식량과 땔나무, 그리고 약간의 김장이었다.
모시고 있던 은사 효봉 선사가 그해 겨울 네팔에서 열리는 세계 불교도 대회에 참석차 떠나셨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음력 시월 초순 하동 악양이라는 농가에 가서 탁발을 했다.
한 닷새 한 걸로 겨울철 양식이 되기에는 넉넉했다.
탁발을 끝내고 돌아오니 텅 비어 있어야 할 암자에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걸망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가 보았다.
낯선 스님이 한 분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나그네 스님은 누덕누덕 기운 옷에 해맑은 얼굴,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합장을 했다.
그때 그와 나는 결연(結緣)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맺어질 수 있는 모양이다.
피차가 출가한 사문(沙門)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리산으로 겨울을 나러 왔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반가웠다.
혼자서 안거하기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정진하는 데는 장애가 많다.
더구나 출가의 연조가 짧은 그때의 나로서는 혼자 지내다가는 잘못 게을러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월 보름 동안거(冬安居)에 접어드는 결제일(結制日)에 우리는 몇 가지 일을 두고 합의를 해야만 했다.
그는 모든 일을 내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진하는 데는 주객이 있을 수 없다.
단둘이 지내는 생활일지라도 물의 뜻이 하나로 묶여야만 원만히 재낼 수 있다.
그는 전혀 자기 뜻을 세우지 않았다.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다.
 
육신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모라잤지만, 출가는 그가 한 해 더 빨랐다.
그는 학교 교육은 많이 받은 것 같지 않았으나 천성이 차분한 인품이었다.
어디가 고향이며 어째서 출가했는지 서로가 묻지 않는 것이 승가의 예절임을 아는 우리들은 지나온 자취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
 
다만 그 사람의 언행이나 억양으로 미루어 교양과 출신지를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나처럼 호남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소화 기능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나는 공양주(供養主, 밥 짓는 소임)를 하고 그는 국과 찬을 만드는 채공(菜供)을 보기로 했다.
국을 끓이고 찬을 만드는 그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시원치 않은 감일지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감로미(甘露味)가 되었다.
나는 법당과 정랑의 청소를 하고 그는 큰방과 부엌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한 끼만 먹고 참선만을 하기로 했었다.
 
그때 우리는 초발심한 풋내기 사문들이라 계율에 대해서는 시퍼랬고 바깥일에 팔림이 없이 정진만을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해 겨울 안거를 우리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아무런 장애 없이 순일하게 안거를 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듬해 정월 보름은 안거가 끝나는 해제일.
해제가 되면 함께 행각을 떠나 여기저기 절 구경을 다니자고 우리는 그 해제철을 앞두고 마냥 부풀어 있었다.
 
                                                  - 법정, 1970 - (무소유 - 18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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