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미리 쓰는 유서(무소유 -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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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ㅣ No.12419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 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루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 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 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신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 법정, 1971 - (무소유 -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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