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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5일 성 루도비코 축일♬ viri galilaei - monastic ch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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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2-26 ㅣ No.989

축일;8월 25일

성 루도비코

LudovicoⅨ 왕 프랑스(1214-1270)

 

중세의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찬왕으로 알려진 성 루도비코는 1214년, 루이 8세와 까스띨레의 블랑슈의 아들로 포와씨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이사벨라성녀의 오빠가 되신다.축일:2월26일)

프랑스의 왕이 되는 대관식에서 루도비코는 하느님이 도유하신 백성의 아버지, 평화의 왕으로 행동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다른 왕들도 물론 똑같은 맹세를 하지만 루도비코가 왕으로서의 의무를 신앙에 비추어 수행한 점이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이었다.

1226년,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두 차례의 폭동을 겪은 후 그는 평화와 정의를 가져왔다.루도비코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그의 어머니인 카스틸의 블랑쉬가 통치했다. 1234년, 그는 19세 때 12세인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며,친히 그들을 잘 길러냈다.그들의 결혼 생활은 사랑에 가득 찼다.그는 두터운 신심에서 나온 정의와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루도비코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자유로이 참배할 수 있도록 두 번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1248년 그의 군대는 나일강의 다미에타를 점령했으나 얼마후 포로가 되었다. 루도비코는 배상금과 함께 다미에타를 포기함으로써 군대를 석방시켰다.그는 4년 동안 시리아에 머물렀다. 그는 십자군으로서도 칭송을 받았지만 더욱 큰 명성은 오히려 나라를 다스릴 때 드러나는 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그는 개혁 법안의 창시자로서 신하들에 대한 법규를 제정했다. 그는 신앙 중거의 시험 형태로 전쟁에 의해 시련을 겪었으며, 법정에서 성문화된 기록을 사용하도록 장려했다.루도비코는 교황권을 항상 존중했지만 왕족의 이익도 수호했고 프리드리히 2세 황제를 파문하여 그를 공격하려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명에 불복하는 대신 황제와 교황을 화해시켰다.

 

그는 병원을 짓고, 환자를 방문하고, 성프란치스코와 함께 나환자를 돌보는 등 그의 백성을 위해 일했다.성 프란치스꼬 제3회에 입회하고 기도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탁월했다. 루도비코는 프랑스 영주와 읍민들,농부들 그리고 사제들, 기사들을 그의 인격과 성덕의 힘으로 통일했다.왕국을 다스릴 때 국민들의 평화와 물질적 진보만이 아니라 그들의 영신적 진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오랫동안 국가는 평화로웠으나 모슬렘이 시리아로 진격하게되자 평화는 깨졌다.  그가 이끌던 십자군은 루도비코의 형을 구하기 위해 튀니스로 향했다. 그의 군대는 한달 만에 질병으로 많은 사람을 잃었고 그도 1270년 카르타고 근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7년 후, 1297년에 교황 보니파시오 7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루도비코는 강한 의지와 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그의 말은 매우 진실했고 행동에서는 용기가 뛰어났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점은 그가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 특히 주님의 비천한 양떼들에게 존경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백성을 위해 대성당, 교회,도서관,병원,고아원을 세웠다. 그는 영주들을 정직하고 공정하게 다루었다.

그는 자기에게 생명과 가족과 조국을 주신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이 다른 사람을 대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대하기를 원했다.

 

루도비코는 매일 13명의 특별한 손님인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했으며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그의 궁전 가까이에서 식사를 제공받았다.

대림절과 사순절 동안에는 그에게 오는 모든이가 식사를 대접받았고, 루도비코 자신도 간혹 그들에게 봉사했다. 그는 통치 지역 전역에 걸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체계적으로 그들을 구제했다.

 

루이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를 꿈꾸었다. 이때문에 그는 정의를 펴고 크리스챤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으로 불리웠다.

 

동시에 그는 예리하고 힘찬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난 말을 한 사실이 없다. 그의 맏아들에게 했던 유언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키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그는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주일 후에 투니스에서 이질에 걸려 운명하였다.

 

성인은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크리스챤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신심은 자신이 프란치스꼬회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재속 프란치스꼬회 남자 수호성인이다.

 

임종시에 그는 이런말을 하였다 : "주님, 저는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리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쌩 데니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루도비꼬가 자기 아들에게 남긴 영적 유언에서

(Acta Sanctorum Augusti 5 [1868], 546)

 

의로운 왕이 이 지상을 진보시킨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무엇보다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아들아,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즉 온갖 대죄를 멀리해야 한다. 어떤 대죄를 범하기보다는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네게 시련이 닥쳐오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너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그것을 인내로이 견디어 내고, 그 시련은 네 유익을 위한 것이고 아마도 네가 그것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에게 어떤 좋은 선물을 베풀어 주신다면 주님께 겸손히 감사드리고, 헛된 영광이나 또는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해 그 선물이 너에게 더 해로운 것이 되지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주님께서 네게 주신 바로 그 선물을 가지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바치는 기도에 기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하여라. 그리고 교회 전례에 참여하는 동안 시선을 흩트리지 말고 잡담하지 말며 염경 기도를 바칠 때나 묵상 기도를 바칠 때나 경건히 주님께 기도하여라.

 

가난한 사람과 비참한 사람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네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돕고 위로해 주어라. 하느님께서 네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드려라. 그러면 한층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리라. 네 수하 사람들을 언제나 정의롭게 대하며 좌우 어느쪽으로건 기울어지지 말고 중도를 택하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못할 때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자 편에 있어라. 너의 모든 수하 사람들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들 가운데 평화와 정의가 깃들이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라.

 

우리 자모이신 로마 교회와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신 교황 성하께 공경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 네 왕국으로부터 온갖 죄악 특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와 이단을 몰아내는데 힘써야 한다.지극히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강복을 너에게 내린다. 성삼위와 모든 성인들께서 너를 온갖 악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주께서 너에게 당신의 뜻을 이행할 은혜를 내려 주시어 네가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 드리며 현세 생활이 끝난 후 우리 함께 그분을 뵙고 사랑하며 영원토록 찬미 바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아멘.

 

 

♬ viri galilaei - 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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