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3월4일 성 가시미로 축일♬ Kyrie-monastic chants-christ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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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3-01 ㅣ No.994

축일;3월 4일

성 가시미로

St.Casimir of Poland

Casimirus (1458-1484)증거자 폴란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 성인

 

1458년 폴란드국왕의 13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난 왕위 계승자였으나 동정의 뜻을 두고 죽을때까지 충실히 이를 지킨 성 가시미로는 그리스도인의 덕행, 특히 정결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심이 탁월하였다. 신앙의 옹호자로 성체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에서 뛰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의 국왕 가시미로 4세이고 어머니는 독일의 엠페롤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사벳이었다. 그녀는 신심이 매우 두터운 부인으로서 자녀들의 교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공경심을 갖게 했다.가시미로도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으며 특별히 성모님께 대한 존경과 정결의 신성함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

 

6세때부터는 유명한  스승인 사제 요한 들루고시의 가르침과 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으며 여러 학문, 특히 종교에 대해 잘 배웠다.카시미로는 이미 십대 소년이었을 때부터 엄격하고 철저한 규칙생활을 하여 맨바닥에서 자고, 대부분의 밤시간을 기도로 보내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자신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1471년 그의 형이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을 때 이웃 나라 헝가리 백성들도 전부터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를 폐위하고 폴란드의 한 왕자를 받들려고 했다. 그러므로 폴란드 왕은 가시미로를 파견하기로 했는데, 그때 그는 겨우 23세 였다. 젊어서도 총명했던 그는 마음속 어딘가 불안감이 없지 않았으나 평소 해왔던 대로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 80명의 군인을 이끌고 헝가리로 향했다. 그러나 국경에는 어느 누구 맞으러 나온 사람이 없었다. 코르비누스 왕이 자기의 폐위를 원하는 반대자들과 화해하고 가시미로 왕자의 일행을 물리치기 위해 대군을 보내려고 한 때였기 때문이다. 왕자는 나이 든 신하의 권고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자는 점잖게 귀국했지만 부왕은 적과의 대결을 하지 않은 아들에게 대단한 불만을 품고 서울에 들어오지 말고 도부스기이 성에 있을 것을 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분노하여,15세의 카시미로를 3개월 동안 감금했다.나이 어린 카시미로는 그의 생전에 다시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

가시미로는 오히려 이 시기를 기도와 선행의 기회로 삼아 엄격한 고행을 하며 거칠고 누추한 의복을 입고 밤에는 마루 위에서 잤다. 특별히 가끔씩은 주님의 수난과 성체께 대한 묵상을 했다.

 

그는 기도와 공부에 전념했으며, 독일 황제의 딸과 결혼하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신을 지키기로 한 자신의 결심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종종 자정에 일어나 성체 조배를 했다. 성당 문이 이미 잠겨 있으면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오랜 시간 기도했다. 아침에는 반드시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했다. 그는 침묵을 가장 즐기면서 또한 가난한 자나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즐겼다.

 

스스로 고아나 과부나 학대받고 있는 자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그들의 구제에 대해 간청했다.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모든 백성에게(가장 가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공평한 정의를 베풀기를 충고한 때도 있었다.

 

카시미로는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께 대한 지극한 사랑을 지녔다.특별히 그는 라틴어로 된 마리아의 찬미가 "Omni die dic Mariae-의역하자면 "매일매일 마리아를 노래하나이다."라는 찬미가를 좋아했다. 그는 이 노래의 사본을 자기와 함께 묻어 줄 것을 부탁했다.이것은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오늘날까지 성모님을 찬미하기 위해 읊어지고 있다.

 

가시미로는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렸다. 의사들은 어리석게도 왕자가 동정을 파괴하면 병세가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그 뜻을 그에게 전하니 그는 몹시 화가 나서 "내가 존중하는 것은 주 예수뿐이지 내 생명이 아니다. 나에게는 이 이상 현세에는 아무 희망도 없다. 너희는 그와 같은 주님의 뜻에 위반되는 일을 말한 죄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책망했다.

 

그 후 점차 병세는 위독해져 경건한 마음으로 병자 성사를 받고 잠시도 십자가를 손에서 떼지 않은 채 끊임없이 "아! 주님! 제 영혼은 당신 손에 맡깁니다"하고 기도하며 이 세상을 떠났다. 때는 1484년 3월 4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리투아니아의 빌나에 묻혔다.

 

그는 살아서부터 폴란드 백성의 존경을 받았지만, 사후에는 한층 더 공경을 받아 그의 전구를 구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그 결과 무수한 기적이 나타났는데, 그중 한 예를 든다면, 1518년 폴란드가 6만의 적군의 공격을 받아 바야흐로 패망이 결정적이었을 때 백은(白銀)의 갑주(甲胄)를 차리고 백마를 탄 한 기사(騎士)가 나타나 겨우 2천명의 폴란드 군인을 지휘하며 의기 양양한 적군에 쳐들어가 순식간에 정세를 회복하고 대승리를 거두고 나라를 태산 위에 안정시켰는데, 이것도 천국에 있는 가시미로의 원조임을 알고 그의 형 시기스문도 왕은 동생의 열성 조사를 교황청에 신쳥했다.

 

1520년 성인품에 올리기 위해 빌나에서 열린 재판과정에서 가시미로의 성덕은 그 베일을 벗게 되었습니다. 즉 성체와 성모님께 깊고 굳게 의탁함으로써 가질 수 있었던 신심이 모든이에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와 구체적으로 사랑함으로써 "형제에게 주는 봉사"야 말로 크리스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가능케 해 주는 십자가의 "영광"이며,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옳지 않은 방식에 대항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투쟁입니다.

 

교황 레오10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리고 그의 무덤을 열어보니 밤색의 머리털, 생생한 얼굴은 옛 모양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마치 잠든 자와 같았다고 한다. 아마 그의 탁월한 정결의 덕이 이 기적을 일으키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는 종이 한장이 쥐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늘의 모후의 찬미가는 매일 읊어질지어다!"라는 그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었다.

 

 

 

 

 

동 시대의 사람이 쓴 성 가시미로의 전기에서

(Cap. 2-3: Acta Sanctorum Martii 1,347-348)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명령대로 재물을 사용하였다.

가시미로는 성령 안에서 놀랍고도 거짓 없는 불타는 사랑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 사랑은 그의 마음에 속속들이 퍼지고 넘쳐흘러 저절로 이웃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겐 그리스도의 가난한 이들과 순례자, 병자, 포로, 그리고 근심 중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어 버리고 자기 자신마저 송두리째 바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었고, 그 일보다 더 원하는 것이 없었다.

 

가시미로는 과부나 고아와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보호자요 변호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요 아들이요 형제였다. 그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넘쳐 행한 모든 일에 관해 일일이 이야기하여 한다면 하나의 큰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정의에 대한 그의 사랑과 절제, 그가 지닌 슬기와 용기, 인내와 항구심을 다 말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그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자유분방한 나이에 이와 같은 탁월한 덕을 지니고 있었다.

 

가시미로는 국왕인 자기 아버지에게 왕국과 속령의 국민들을 다스림에 있어 정의를 실천하도록 매일같이 간곡히 청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부주의나 인간의 약점 때문에 어떤 국사를 소홀히 다룰 때 그는 빠짐없이 아버지께 그 사실을 겸손히 지적해 주었다.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의 문제와 청원을 마치 자기일인 듯 받아 주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가난한 이의 옹호자"라고 불렀다. 자신은 왕자이고 귀족의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건 하찮은 사람이건 관계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대하고 말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어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나 권력자보다는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인 온유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언제나 더 좋아했다. 그는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누리는 권력을 결코 구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주려고 하는 왕권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라고 부르셨던 재물로 인해 영혼이 해를 입고 세속 사물의 오염으로 인해 부패되는 것을 염려했다. 집안 사람들과 그를 잘 알고 있었고 아직도 생존해 있는 위대한 많은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일생을 동정으로 살다가 동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폴란드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은 갖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굳건히 머물러 있었다. 그들의 젊은 수호 성인이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것이었다.

평화는 전쟁으로 얻을 수 없다. 때로는 덕으로도 안락한 평화를 얻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평화는 철의 장막까지도 꿰뚫고 들어간다.

 

 

 

 

♬ Kyrie - monastic chants-christdesert

 

★성가안내

게시판 961번(2월15일 성 파우스티노와 성 요비타형제순교자축일)부터 성인축일난

The Monastery of Christ in the Desert(Benedict)  성가19곡을 올렸습니다.

Kyrie를 처음에 올리지 못하여 끝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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