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올 2월부터 한 아파트에서 무연고 탈북 청소년 한 명을 데리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엄마로, 때로는 이모로, 때로는 친구로 지냅니다. 요즘 제가 다리를 다쳐 아무데도 나가지 않으니까 참 좋은가 봅니다. 다리를 다치기 전에는 전국의 북한 이탈주민들을 방문하러 다니느라 한 달에 10여일은 출장을 다녔거든요.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학원에 갔다 와서 제가 없으면 ‘수녀님, 수녀님’ 하고 찾아다닙니다. 며칠 전에는 머리염색을 해 달라고 염색약을 사갖고 와서 온갖 아부(?)를 다했습니다. 제가 염색약 사오면 물들여 주겠다고 했다나요. 생전 처음 염색하는 솜씨라서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워낙 까다로운 아가씨라 완성되는 모습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건 뻔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토닥토닥하며 지내는 그녀는 다른 탈북 여성들이 무척 부러워합니다. “너는 얼마나 좋겠나? 수녀님 사랑을 독차지하고. 야, 부럽구나야!” 그러나 그녀는 얼마나 좋은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파트는 탈북여성이면 누구든 마음이나 몸이 힘들 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든 것이어서 많은 이들이 드나듭니다. 늘 기뻐하고 씩씩하게 지내는 그녀는 언니들이 다녀가고 나면 입이 나옵니다. “언니들이 오면 설거지하고 가라고 해요. 청소도 하라고 해요” 등 주문이 많습니다. 어느날 맘먹고 앉아 대화를 나눴습니다. “너는 늘 함께 살지만 언니들은 힘들 때만 와서 겨우 힘을 얻어가는데 수녀님 도와줘야지.” 그럴수록 투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떤 날은 “저도 여기 살지 않고 왔다갔다하면서 어쩌다 한번 들르는 사람이면 좋겠어요”라는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곳으로 가겠느냐고 물으니 “아뇨!”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늘 그분 안에서 사랑을 받고 있기에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매일 마시는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 것처럼요. 감사하는 습관이 부족한 제가 함께 사는 우리 아가씨에게 감사하는 연습을 잘 못 시키는 건 아닌지 깊이 반성하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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