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소록도를 떠날 수 없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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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4-10 ㅣ No.4747

 

소록도를 떠날 수 없는 스물아홉살 청년

 

1916년 일제 총독부는 소록도에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할 것임을 명했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자혜의

원이 지금의 국립소록도 병원이다. 한때 수용 환자가

1만 2천명을 넘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8천명으로 줄었다.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고,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정관수술

까지 받는 치욕적인 설움을 당한 한센병 환자들.

한센병이 유전병도, 전염병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1963년 강제 격리법이 폐지 되었지만, 아직도 사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눈은 차갑기만 하다.

그래서 병 자체는 오래 전에 치유가 끝났지만 편견 때문

에 사회로 복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심지어 한센병 환자의 가족들조차 그들이 사회로 복귀하

는 것을 꺼리는 사례가 허다하다.

지금 소록도에 살고 있는 한센병 환자의 평균 연령은

71세이며, 8천여 명 중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는 100여명 뿐이다.

 

어린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소록도’라 이름 붙여진 아름

다운 섬. 그 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겐 소록도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갇힌

공간이며 유배지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슬픈 사실은 이제 외부 사람들이 자신들을

꺼리는 걸 체념한 듯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낯선 방문객을 맞을 때면 그들은

으례 이렇게 말합니다.

 

"가까이 오기가 불편하면 거기서 말씀하셔도 돼요."

그러면서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짓는 한센병 환자들.

그런데 그처럼 시리고 아픈 그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소록도 자원봉사자 김용운님(29세).

그의 하루는 스쿠터를 타고 한센병 환자들에게 달려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적막한 삶에 지친 그들에게 그는 반갑기 그지없는 손님입

니다. 그의 주된 일과는 고장난 전자제품을 수리하는 겁

니다.

소록도에 오기 전까지 기계 부속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

그는 이 곳에 와서 자신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

니다.

 

"할머니, 저 배고파요. 밥 좀 주세요."

원래 자원 봉사자들은 따로 먹는 식당이 있지만 가끔씩

그는 그들과 밥을 같이 먹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자신과 같은 밥상에 들러앉아

밥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말해 주는 걸 무척 좋아합니다.

그는 그 말못할 슬픔을 이해하기에 밥 먹는 내내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 줍니다.

기계를 고치는 것말고도 그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심부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장 볼 것과 필요한 물건들을 받아 적

습니다.

필요하면 손과 발이 다 문드러진 환자들이 사는 집에 들러

서는 방청소나 반찬 만드는 일도 돕습니다.

몸이 불편한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 곳에 온 것은 1년 4개월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소록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젼을 봤는데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왔어요.

그런데 와 보니까 산도 바다도 사람도 다 예뻐요."

소록도에 아름다운 노을이 집니다.

일과가 끝나고 나면 그와 같은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숙소로

모여듭니다. 다음날 그는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입니다.

그 동안 받은 주문이 적잖이 밀려 하루 걸음에 장을 보고

오려면 서둘러야 하니까요.

소록도 사람들은 섬에서 나가기가 힘듭니다.

전염성이 없는 병인데도 한때 나명이라 불리던 시절의 편견

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오늘도 소록도에서 뭍으로 나온 손님은 그 혼자

뿐입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치킨 가게.

미리 주문을 해 놓고 다른 물건들을 사기 위해 바쁘게 움직

입니다. 먹거리부터 옷까지 하루 종일 시장 바닥을 누비면

서도 피곤한 줄을 모릅니다. 장을 보고 나면 물건들을

집집마다 그의 몫. 주문량도 품목도 정확하게 게다가 거스름

돈까지 꼭꼭 챙겨다 줍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정이 어디 가나요?

 

"음료수 사 먹어. 갖고 가, 갖고 가."

’자원봉사(voluntarism)’ 라는 자유 의지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voluntas’ 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낱말의 뿌리로 볼 때 자원봉사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닌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살이 문드러진 흉한 한센병 환자들을 제대로 볼

수나 있을까 두렵기도 했다는 김용운 님.

그러니 이제는 압니다.

물론 그런 모습의 환자들도 있지만 그들도 그냥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쩌다 앓게 된 무서운 질병으로 멸시를

당하며 외롭게 사는, 이제는 더 잃을 것도 없이 황량한

소록도 사람들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따뜻한 온기를 불어

넣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아직은 그가 소록도를 떠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착한 사람들에게는 소록도에 사는 사슴이 보인다는데

그는 벌써 보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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