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예수와 만난 사람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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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3-12-23 ㅣ No.9912

 

엠마오 가는 길에서

 

 

글레오파와 나는 나란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등졌다. 더 이상 거기에 머물러 있을 필요도 없었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예언자들을 죽이는 곳, 예언자들의 뼈가 쌓여 언덕을 이룬 곳, 거기서 그분도 죽고 말았다.…

그 분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가실 때 우리는 얼마나 가슴 벅차게 호산나를 외치며 눈물마저 뿌렸던가? 몇몇 관리들이 그분에게 다가가 소요하는 무리들을 잠잠케 하라고 압력을 넣었을 때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를 열광시키고도 남았었다. “누구도 저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막지 못한다. 저들이 잠잠하면 길가의 돌멩이들이 소리칠 것이다.”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는 목청껏 외쳐댔었다. 그분은 왕이었다. 우리를 이교도들의 압박과 질곡으로부터 건져내 줄 우리의 위대한 다윗이었다. 누가 그의 앞길을 감히 가로막을 것인가? 아아, 그 날의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성전 마당을 어지럽히고 있던 환전상놈들과 비둘기, 양을 파는 놈들을 둘러엎어 내어쫓을 때, 바로 그것이 우리의 천지개벽이었다. 그분이 성난 음성으로 “거룩한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놈들아!” 소리치며 앞장서서 탁자를 둘러엎고 비둘기를 날려보낼 때, 우리는 마음껏 해방의 기쁨을 누리며 그 소란스러운 북새통에 뛰어들었었다. 먼지가 일어나고 환전상들의 아우성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법의 이름으로 보장되던 거짓 질서와 평화를 깨뜨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 순간인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팔다리 없는 벙어리처럼, 그렇게 살아왔던가? 그 날 밤, 우리는 마침내 빼앗겼던 성전을 되찾는 줄로만 알았었다. 기름진 제 배를 하느님으로 여기는 밉살머리스런 종교적 특권층들이 모두 역사의 쥐구멍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이제는 공명정대한 새날이 밝아오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대한 배신이었다.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로서는 좀처럼 견딜 수 없는 배신감이었다. 그분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희생양처럼 말 한마디 없이 거짓 재판자리에 잠시 섰다가 꼭대기에 달리고 말았다. 그가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붉은 피를 쏟고 있을 때, 우리는 무슨 환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오히려 처참한 그의 죽음이 현실로 굳어져 가면서 며칠 전 환전상을 내쫓고 탁자를 둘러엎던 그 장면이 엉뚱한 환상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모든 꿈이요, 그토록 뚜렷하던 우리의 현실인 그분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죽어갔다. 하늘도 잠잠했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갑옷을 입은 로마군인들이 창칼 들고 지켜보는 가운데 그분의 시신이 말없이 거두어질 때, 글레오파와 나는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터져나오는 오열을 삼켜야만 했다. 우리의 꿈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그토록 간절하게 희망한 자유와 평화는 이번에도 이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하늘 아래 두 바로 서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이제 우리는 여기 더 서 있을 필요가 없다는 느낌만이 유일하게 분명한 사실이 되어 우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등지기로 했다. 우리를 배신해버린 예루살렘! 단 한번도 우리편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예루살렘, 눈부신 성전의 흰 이마를 볼 때 우리는 역겹기만 했다. 더구나 그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하러 달려갔을 때 우리를 맞아준 빈 무덤의 그 허전하고 어두웠던 공간은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허둥대는 듯한 말투는 우리의 공허한 마음을 더욱더 공허하게 만들뿐이었다. 그분의 시체마저 없어진 예루살렘! 우리가 거기 더 머물러 있을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늘이 버린 도시, 땅조차 버린 공허한 도시, 예루살렘을 등지고 우리는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삶의 의미도 목적도, 수단도 모두 잃어버린 채 우리는 빈 껍질이 되어 무겁기만 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역사는 또 한번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이스라엘 구원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우리의 백일몽일 뿐인가? 이렇게 다시 한번 우리의 꿈은 짓밟혀야만 하는 것인가?

바로 그때, 그분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우리를 그 절망과 허무의 도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분은 아까부터 우리가 가고 있는 엠마오 쪽으로 우리보다 조금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더뎠고 우리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 만나 함께 걸어갔다. 그런데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형씨들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소? 왜들 얼굴 표정이 그리 침통하지요?”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글레오파가 입을 열어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도 우리처럼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왜 우리가 이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오? 요 며칠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로 모르오?” 그가 맑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우리는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나자렛 사람 예수 얘기요. 그분은 진짜 예언자였지요. 우리에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신 분이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소.” “그런데 어찌 되었소?” “그분은 로마군인들이 죽였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그를 내어주었던 것이오. 부끄러운 일이지….” 이어서 나는 그가 죽어간 일, 그의 무덤에서 시체가 없어진 일, 가서 우리의 눈으로 확인한 빈 무덤까지를 죄다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말없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더 있을 까닭이 없어 졌지요. 예루살렘은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하느님도 거기 우뚝 서있는 성전에서 떠나신 지 오래요.” 내 말이 끝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작고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거역 못할 어떤 힘이 들어 있었다. “형씨들의 심정은 알겠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형씨들은 하지 않아도 될 낙담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 “하지 않아도 될 낙담이라니?” “생각해보시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는다면 어찌 거기서 새싹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런 말은 전에도 그분한테서 들은 적이 있는 말이오. 당신은 그 말을 누구한테 들었습니다?” 이렇게 물은 이는 글레오파였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에게 듣기 전에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 아니오? 당신네 스승 되는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분도 뭘 좀 알긴 아는 분이었군요. 허허허….” “그래서 그분의 죽음과 밀알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진리는 언제나 평범한 데 있어요. 사람들은 까다로운 특수 지식을 얻는데 많은 힘을 쓰면서도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는 데는 소홀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지! 그건 그렇고….?” 그는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은 맑고 푸른 하늘처럼 한없이 고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무슨 뜨거운 불덩이를 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형씨들은 성경을 읽어보지 못했소? 사물에는 이치가 있는 법이오. 메시아가 고난을 받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메시아일수가 있겠소? 형씨들, 내 말을 들어보시오….”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비롯해서 하느님의 고난받는 종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막힘 없이 들려주었다. 그의 말은 과장도 없이 비약도 없이 마치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는 물처럼 그렇게 우리의 가슴을 적셨다. “…죽지 않고는 살수가 없는 법이오. 형씨들의 그분은 그래서 죽었고 그렇게 살아나신거요. 씨를 뿌리지 아니하고 어찌 열매를 거둘 수가 있겠소?” “그렇다면 당신 말은 과연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오?” 내가 이렇게 다그쳐 묻자 그는 나보다 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씨는 그 분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셨다 했지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요.” “그렇다면 형씨가 똑똑히 보았듯이 그분은 그렇게 다시 살아났을 것이오.” “그렇지만 우리가 본 것은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빈 무덤뿐이었소.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그분은 보지 못했어요.” “눈을 크게 뜨고 보시오.” “이 길 위에는 지금 우리 셋밖에 없지 않소? 도대체 무엇이 보인단 말입니까?” 그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형씨들이 살아 있고 그분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요. 아무튼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시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어느덧 우리는 엠마오 마을 어귀에 이르렀다. 길이 갈라진 샛길로 들어서야 했다. “자, 이제 우리는 저기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가 다시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부디 잘들 가십시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섰다. 수염이 텁수록한 그의 옆얼굴에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을 얼핏 훔쳐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던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때마침 서산 너머로 지는 해가 그의 등뒤로 길쭉한 그림자를 남겨놓았다. “어때? 저 사람, 어디로 가는 사람일까?” 글레오파가 나에게 물었다. “무척 외로워 보이는군!” “그래, 게다가 바쁜 사람 같지도 않아!” “곧 밤이 될터인데….” 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글레오파가 소리쳐 그를 불렀다. “여보시오 형씨”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얼굴 전체가 그림자가 가리워 더욱 우울하게만 보였다. “어디까지 가시는 길이오?” “먼길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의 말소리가 무슨 바다라도 건너오는 것처럼 멀게 들려왔다. 우리는 서 있는 그에게로 걸어갔다. “오늘은 이미 날도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마을로 가서 하루 밤 묵어다가 가시도록 합시다.” 글레오파와 내가 양쪽에 서서 그의 팔을 잡았다. “길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던 좋은 말씀을 좀더 들려주시오.” “형씨들한테 폐나 끼치는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우리 집이니까요.” 그레오파가 쾌활하게 대꾸했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작지만 오붓한 잔치를 마련했고 마침내 그와 식탁에 앉았다. “그래, 형씨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었소?” 글레오파가 씻은 손을 수건에 닦으면서 물었다. “딱히 갈곳도 없답니다.” 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먼 길을 떠났다더니요?” “그렇지요. 먼 길이지요.” “그럼, 오늘밤은 어디서 이슬을 피할 생각이었소.” “모르지요. 집도 없는 몸이니까요. 야곱처럼 아무데서나 누워 돌베개를 베면 그곳이 나의 잠자리지요.” “뜨내기시로군!” “그렇소.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고 보금자리가 있지만….” “잠깐! 그 말도 우리가 스승한테서 들은 말이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많지요.” “여우라면, 그건 우리 스승이 헤로데를 가리켜 한 말인데….” “강자에게 붙어먹는 짐승이지요.” “그렇다면 새들은 누굴 말하는 겁니까?” “로마군대의 깃발에 새를 보지 못했나요?” “아하! 역시 당신은 뜨내기시로군. 자기 땅에서 내쫓긴 뜨내기…”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많지요.” 그는 조금 전에 한말을 되풀이 한 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 좋은 음식이 차려졌군요, 갈 곳 없는 뜨내기를 이렇게 식탁에 불러주시니 고맙습니다. 외람되지만 이 음식에 대한 감사 기도를 올리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았다. 그가 감사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 일용할 양식을 주시어 이렇게 더불어 나누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멘.” “아멘.” 그가 자기 앞에 놓인 빵을 떼어 우리에게 나눠주며 말했다. “아버지가 나누라고 주신 빵입니다. 지금도 이 빵을 먹지 못해 굶고 있는 형제들이 있지요.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은 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있는 빵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지요. 빵을 나누지 않으면 독약과 같은 것, 혼자서 먹으면 그 때문에 자기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우리는 그가 나눠준 빵을 받았다. “나누면 모두 살지요. 빵은 하늘과도 같아 아무도 독차지해서는 안됩니다.” 그 순간이었다. 식탁 바로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등잔불 빛에 그의 얼굴이 환하게 타오르며 방안이 갑자기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글레오파와 나는 들고 있던 빵을 식탁 위에 던지면서 무릎을 끓었다. “선생님!” 그분은 그때, 우리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선 그의 환하게 빛나는 얼굴! 그것은 분명히 우리 앞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바로 그분의 얼굴이었다. “형제들, 어서 일어나시오.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의 빵을 어서 나눕시다.” 그러나 어떻게 태연스레 않아 빵을 씹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갑작스럽게 닥친 이 설명할 수 없는 사태에 임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나에게 해준 대접을 잊지 않겠소. 형제들은 부디 나를 잊지 말아주오.” 우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굴을 들어 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아무대도 없었다. 문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방안에는 없었다. 다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분명한 소리가 있었으니,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오. 형제들을 배신한 이곳에 와서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하시오! 우리들의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 날 밤을 거기, 엠마오에서 보낼 것인가? 글레오파와 나는 그 길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우리는 별들만 총총한 하늘에 대고, 거기 충만한 어둠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죽여봐라, 이놈들아! 안 죽는다, 이놈들아! 아무리, 아무리 죽여 보아라. 그래도 자꾸만 살아난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루가 24, 13-35)

 

이현주 지음, “예수와 만난 사람들”(생활성서사 출판) 중에서

첨부파일: Jesus-9.hwp(1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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