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동서의 시력(무소유 -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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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4 ㅣ No.12398

내 몸이 성할 때는 조금도 그런 생각이 없는데,
어쩌다 앓게 되면 육신에 대한 비애를 느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모른 체했다가,
조금 지나서는 큰마음 먹고 약국에 들른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토록 머리 무거운 병원 문턱을 들어설 때 그 비애를 느낀다.
진찰권을 끊고 차례를 기다리며 복도에 앉아 있는 그 후줄근한 시간에는 내 육신이 사뭇 주체스러워진다.
의사를 대했을 때 우리는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된다.
 
재작년 겨울이던가,
눈이 아파 한동안 병원엘 드나든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성전 간행 일로 줄곧 골몰했더니 바른쪽 눈이 충혈되고 찌뿌드드해 무척 거북수러웠다.
안약을 넣어도 듣지 않았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하루는 마음을 크게 먹고 신문에 자주 나오는 안과를 찾아갔다.
나처럼 서투르고 어설픈 사람이면 대개가 그렇듯이 광고의 유도를 받은 것이다.
 
그 안과는 어찌나 환자들로 붐비던지 진찰받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몇 곱절 더 길었다.
의사는 밀린 환자 때문에 그랬는지 경기장에서 갓 나온 운동 선수처럼 씩씩거리면서 내 눈을 살폈다.
시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기표소처럼 휘장이 쳐진 구석을 가리켰다.
대기하고 있던 간호원이 철썩 엉덩이에 주사침을 꽂았다.
그리고 안약 한 병.
지극히 간단하고 신속한 진료였다.
날마다 오라고 했지만 나는 그 의사의 초대를 사양했다.
날마다 찾아갈 성의도 여가도 함께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 의사에게 신뢰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친걸음에 다음날은 그 길 건너에 있는 안과를 찾아갔다.
분위기가 차분했다.
물론 씩씩거리지도 않았다.
병명은 구결막 부종.
우리 시민 사회의 말로 하자면 눈의 흰자가 좀 부었다는 것이다.
시력에는 영향이 없으니 걱정말고 눈을 푹 쉬라고 했다.
그런데 출간 예정일 때문에 눈을 쉬게 할 수가 없었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몸이 따르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이었다.
 
그렁저렁 두어 주일이 지났다.
의사는 걱정마라 했지만 당사자인 나는 차도가 없으니 속으로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번듯한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그곳은 진찰권을 끊는 창구부터가 큰 혼잡이었다.
복도마다 환자들로 장을 이루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갈데없이 나도 환자로구나 싶었다.
 
한 시간 가까이 안과 앞에서 기다리다 못해 그만 일어서려는데.
그때 유감스럽게도 내 이름을 불렀다.
진료에 참고가 될까 해서 그간의 경과를 이실직고했더니,
담담 의사는 갸웃거리면서 내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내리갈겼다.
 
간호원은 나를 혈액 검사실로 보냈다.
그러고 나서는 변을 받아 오라고 했다.
이거 왜 이럴까 싶었지만 착한 어린이가 된 환자라 시키는 대로 순종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하, 종합병원이란 곳은 참으로 종합적으로 진찰을 하는 데로구나.
주머니 실력도 종합적으로 공평하게 분산시키는 데로구나.
 
혈액이고 변이고 검사 결과는 물론 정상이었다.
그토록 정상인 내 몸을 이번에는 또 수술실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조직 검사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는 조직 검사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었다.
만약 사전에 알았더라면 그것만은 단연 불응했을텐데.
 
                                                  - 법정, 1973 - (무소유 -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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