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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의 시력(무소유 -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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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5 ㅣ No.12399

수술대에 누이더니 눈 언저리에 마취 주사를 놓았다.
구결막을 두어 군데 오려내고 꿰매는 것이었다.
내 눈은 납치범이 아닌 의사의 손에 의해 철저히 봉해졌다.
이것도 뒤늦게야 안 일이지만,
혹시 암이 아닌가 싶을 때 조직검사를 한다는 것이다.
한 주일 후에야 그 결과가 판명된다는 말을 듣고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나는 몹시 답답하고 막막한 심경이었다.
 
귀로에 나는 문득 내 육신에 대해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평소 잘 먹이지도, 쉬게 하지도 못하고 너무 혹사만 했구나 생각하니 새삼스레 연민의 정이 솟았다.
 
그리고 업보로 된 이 몸뚱이가 바로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거듭거듭 절감하게 되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그 한 주일 동안은 불안한 나날이었다.
불필요한 상상력이 제멋대로 날개를 쳤다.
젠장 살다가 병신이 될 모양인가.....
 
이때 나는 베토벤이 아니었더라면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떠한 병고라 할지라도 그가 겪은 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다.
그의 가혹한 운명적인 생애가 병고에 위축된 그 겨울의 나를 따뜻하게 그리고 밝게 조명해 주었던 것이다.
 
검사 결과는 혈관이 좀 수축되었다는 것, 그뿐이었다.
다행이라 싶었지만 한편 생각하니 괘씸했다.
돈 들이고 병을 산 셈이 아닌가.
그 동안에 입은 정신적인 피해는 놔 두고라도 조직 검사로 인해 눈을 더 망쳐 놓은 것이다.
의사 자신이나 그 가족의 경우였다면 그같이 했을까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 마음 먹기로 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왜 하필이면 내가 그날 그 병원에 가서 그 의사한테 진료를 받게 됐을까.
그것은 모두가 인연의 줄에 얽힌 까닭일 것이다.
설사 그 의사의 신중하지 못한 임상 실험으로 내 육신이 피해를 입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지어서 받은 과보이다.
내가 아쉬워서 내 발로 찾아갔으니까.
그리고 유기체인 이 육신을 가지고 항상 온전하기를 바란다는 것부터가 과분한 일 아닌가.
 
눈은 그 뒤 한의사의 가루약 다섯 봉지를 먹고 나았다.
조직 검사의 자국만은 남긴 채.
그 한의사의 말인즉,
너무 과로했기 때문에 간장에 열이 생겨 상기됐다는 것.
상기가 되면 구결막이 붓는 수가 있다고 했다.
간장의 열만 다스리면 저절로 나을 거라고 지어 준 약을 먹었더니 이내 나았다.
 
그런데 모두가 의학박사이기만 한 그 양의사들은 병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겉에 나타난 증상만을 치료하려 했다.
 
그때 나는 안질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사회 현상을 비롯한 사물의 실상을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시야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시력(과점) 같은 걸 내 나름으로 잴 수 있었다.
막막하 그 육신의 비애를 치러 가면서.
 
                                                  - 법정, 1973 - (무소유 -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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