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나그네길에서(무소유 - 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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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0-06-01 ㅣ No.12406

그 시절 내가 맡은 소임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찬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진 시간이 되면 착실하게 좌선을 했다.
양식이 떨어지면 탁발(托鉢, 동냥)을 해오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40리 밖에 있는 구례장을 보아 왔다.
 
하루는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설을 한 권 사 왔었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라고 기억된다.
아홉 시 넘어 취침 시간에 지대방(고방)에 들어가 호롱불을 켜 놓고 책장을 펼쳤다.
출가한 후 불경 이외의 책이라고는 전혀 접할 기회가 없던 참이라 그때의 그 책은 생생하게 흡수되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읽는데 방문이 열렸다.
선사는 읽고 있던 책을 보시더니 단박 태워버리라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출가'가 안 된다고 했다.
세속에 미련이 없는 것을 출가라고 한다.
 
그길로 부엌에 나가 태워 버렸다.
최초의 분서였다.
그때는 죄스럽고 좀 아깝다는 생각이었지만,
며칠 뒤에야 책의 한계 같은 걸 터득할 수 있었다.
사실 책이란 한낱 지식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
거기에서 얻는 것은 복잡한 분별이다.
그 분별이 무분별의 지혜로 심화되려면 자기 응시의 여과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전까지 나는 집에 두고 나온 책 때문에 꽤 엎치락 두치락거렸는데,
이 분서를 통해 그러한 번뇌도 함께 타 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풋중 시절에는 온갖 분별을 조장하는 그런 책이 정진에 방해될 것은 물론이다.
만야 그때 분서의 일이 없었다면 책에 짓눌러 살았을지도 모른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찬거리가 떨어져 아랫 마을에 내려갔다가 낮 공양 지을 시간이 예정보다 십분쯤 늦었었다.
선사는 엄숙한 어조로 "오늘은 단식이다. 그렇게 시간 관념이 없어서 되겠니?" 하는 것이었다.
선사와 나는 그 시절 아침에는 죽을,
점심때는 밥을 먹고,
오후에는 전혀 먹지않고 지냈었다.
내 불찰로 인해 노사(老師)를 굶게 한 가책은 그때뿐 아니라 두고두고 나를 일깨웠다.
 
이러한 자기 형성의 도량을 차마 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나마나 관광지로 주저앉았을,
고시 준비를 위한 사람들의 별장쯤으로 빛이 바래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그네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자신의 속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이 단순한 취미일 수만은 없다.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법정, 1971 - (무소유 - 16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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