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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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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한 [jelka] 쪽지 캡슐

2004-03-23 ㅣ No.514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

             

     예수회.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 취득.      신약 주석학 박사. 현재 서강대학교 대학원 교수

 

 

 

    1. 용서하지 않으면 안되는 첫째 이유는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상대방이 뉘우쳤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분노, 화,

적개심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차게 되면 무엇보다 우리 몸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내가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일찍 죽는다면 얼마나 더 억울한 일인가?

 

   2. 용서해야하는 두 번 째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피곤한 사람으로 찍히지 않기 위해서다.

함께 지내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늘 불평 불만에 차 있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불행했던 지난날을 붙들고 살면서 이웃을 탓하고, 가족을 원망하고,

늘 불만에 차 산다면, 처음에는 당신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려 주고

힘이 되어주고자 왔던 사람들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멀어져 갈 것이다.

단순히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분노와 적개심이 주는 전염병이 무서워 피할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마치 꽃에다 물을 주듯이 상처에다 미움이라는 물을

주고 있는 셈이 된다. 내게 상처준 그 사람이 내 마음속을 다 차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인생의 귀한 시간을 그 미운 사람이 다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곧 마귀에게 자기 마음을 내어주는 것과 같다.

마귀의 운동장에서 놀지 않으려면, 다른 이들에게 피곤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미움이라는 악순환에서 뛰쳐나오는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뉘우치기를 기다리면서 ’마귀의 운동장’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그 운동장을 뛰쳐나오는 것이다.

 

용서하기 위하여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심이 필요하고, 그 다음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용서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지이다.

주님의 지상명령이기에 용서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이다. 응어리진 마음이 하느님의 자비로 대치되고, 좁은 이해심이 하느님의 관대함으로 대치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해야 한다.

용서해야할 사람의 명단을 작성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처가 치유되느냐 안되느냐의 열쇠가 바로 나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를 치유시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생 상처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내 상처를 아물 게 할 사람은 오직 나 자신과 하느님 뿐이다.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일어서는 것이다.

 

   "인생은 마치 베틀로 짜여진 복잡한 무늬의 융단과 같다. 유전적인 요소, 환경적인 요소, 어렸을 때의 경험, 부모, 선생님, 친구로부터 받은 영향, 인생의 모든 장애물들, 이 모두가 베틀의 씨줄이 되고 그 위를 당신이 날줄이 되어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베틀리

왔다갔다하면서 당신의 반응에 따라서 인생이라는 융단이 짜여지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그치고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손상된 감정을 절대로 치료받지 못한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나를 아프게 한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용서하기가 쉬워진다. 이것은 그에게 값싼 용서를 베풀자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값싼

용서와 분명히 다르다. 값싼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애써 좋게 봐주는 것이다. 이것은 저지른 악을 외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는 저지른 잘못이나 악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단죄하되 용서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한 일은 어떤 이유에서든 잘못이야. 어머니는 내게 더 잘해 줄 수 있었는데도 그런 잘못을 저지른 거야. 내 인생에 큰 해를 입히고, 큰 상처를 주었어. 하지만 나는 이제 어머니를 용서할 꺼야.’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용서하는 과정에서 용서 콤플렉스에 빠지면 안된다. ’나는 정말로 용서하였는가?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여전히 아프고 섭섭한 것일까? 그래,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거야.’ 이렇게 속단하지 마라.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였다면 더 이상은 그 사람 때문에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가 용서를 한다고 해도 몸자체가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얼굴은 굳어지고 아픈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올 것이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을 용서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었을까? 상처받은 내가 바보지. 그런 내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단죄는 파괴적이고, 병적이고, 비그리스도교적이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단죄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단 말인가?

 

    병자와 중독자에게는 용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 병자로부터, 중독자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를 받고 있는 사람이 신앙의 이름으로 참고 견딘다든가 용서한다든가 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값싼 용서로는 상대를 참으로 용서할 수 없고

서로에게 비극적인 종말만을 초래할 뿐이다.

 

 

   이제 간략히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 베개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앉으라. 성호를 그은뒤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맺힌    분노, 적개심, 한을 강렬하게 표현하라. 치유되려면 반드시 화를 노출시킬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분노가 극에 달하고 참기 어려우면 주먹으로 옆에 놓아둔 베개를 쳐라.

둘째, 증오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맺힌 한을 풀고 싶다는 바람을 주님께 드리라.

셋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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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이야기한 상처는 ’진짜 상처’이다. 진짜 상처와 사소한 상처는 구분되어야 한다. 진짜 상처라면 우리는 미움의 악순환이라는 운동장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사소한 상처라면 그러한 상처를 자초한 우리의 미성숙한 태도에서 벗어 나야한다.

 

     사소한 상처에서 해방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해본다.

 

     첫째, 기대하지 말라. 상대방이 어머니처럼 나를 돌보아주고 헤어려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버려라. 우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다. 자녀에게조차도 기대하지 말자. 우리가 자녀에게 바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대가 아니라 희망이다.

    상대방이 어머니처럼 알아서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존경심이 낮으면서

동시에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많은 경우 마음이 부글부글 끊을 때가 되어서야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한다. 상대방이 해주기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할 수 없어 도움을 청하는 것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상대에게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임을 믿기에 솔직하게 청하는 것이다.

 

    둘째, 추측하지 말라. 추측하면서 상대방과 상황을 내 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을 오해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상처받고 있는가.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것은 많은 경우, 나와 그 사람 사이의 행동양식이나 인지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이다. 그러니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만

추측하고 판단하고 상처받는다면 그 상처는 내가 자초한 것이다.

     인디언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의 행동양식과 인지구조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아야 한다."

    셋째, 앞으로 인정과 애정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마라. 우리에게는 한가지 환상이 따라다닌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이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다 대고 가만히 물어보라.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인가? 남들의 존경인가?’ 만약 가슴이 따스해지는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영혼의 느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의 느낌이다. 곧 무한한 세상이 주는 느낌이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 싶어하신 것은 자유이다. 죄에서 자유롭고, 죽음에서 자유롭고,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애진인(無碍眞人)이 되어 살 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진실된 인간 말이다. 인정과 사랑은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주면 받을 뿐이다. 우리는 왜 남이 주었다

말았다하는 것들을 향해 애달아하는가?

   

    넷째, 지금 당장 당신 안에 있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 ’나는 완벽해야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된다.’ ’내 사전에 2등은 있을 수 없다.’ 등의 태도는 모두 상처를

낳는 텃밭이다. 상처의 텃밭은 여러 가지가 있고, 개인마다 그 모습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통상 우리가 받는 상처들은 어느 정도 미리 결정되어 있다. 우리가 속상하고 심란해지는 것은 외부에 그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외부는

재료만 제공할 뿐이다. 존 포웰은 "어느 누구도 우리 감정의 직접적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우리의 감정을 건드릴 뿐이다." 하고 말한다.

 

    다섯째,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자기 존중심이 없는 이들은 쉽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단죄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 실패한 존재로 간주해

버려 쉽게 상처를 받는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큰 적은 자기 비하이다. 영성가들은 이를

악마의 운동장이라 부른다.

 

     좋은 어머니, 좋은 아내, 즉 현모양처의 경우에 자기 존경, 자기 사랑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어쩌다 시간을 좀 갖거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충족하게 되면 뭔가 불안해하고 죄스러움을 느낀다. 자기 존중감이 없고 자신에 대해

사랑을 베풀 줄 모르는 여성은 이기적인 아이들과 자기 중심적인 남편을 만들뿐이다.

 

    인간관계 안에서 건강한 자기 사랑이 없다면 사소한 의견차이로 큰 싸움이 벌어진다. 서로 다른 의견, 서로 다른 행동을 하게 될 때 자기 사랑이 결여된 사람은 즉시 애정이

사라진 것으로 간주해서 상대를 미워하거나, 혹은 자신이 틀렸다고 보아 무조건 상대에게 자신을 맞춘다. 이런 사람은 다른 이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바람이 너무 커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애를 쓰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 행동한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고슴도치의 그것과 같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쓸쓸하고, 가까이 가면 상처를 받는 관계.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해야한다.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아쉬워한다는 것이요, 고독하다는 것은 사람을 아쉬워하기보다 홀로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고독이란 자신을 위한 공간,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가지 사랑이 담겨있다.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사랑. 이 세가지

사랑이 하나가 되어 있기에 하나가 없이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자기 사랑을 거부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때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 대한 존경을 높인다고 하면서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성숙되지 못한 자기 사랑은 이기심과 다를 바 없다. 어떻게 우리는 이기적이 아니면서 올바르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신체와 감성, 영성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 성숙으로 나아가면 된다. 건강한 자기 사랑은 갈릴래아 호수처럼 그 움직임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기심은

사해처럼 그 움직임이 안으로 들어가서는 그 안에 머물러 말라 버린다. 성숙한 자기 사랑은 생명을 받아서 그 생명을 남과 나누지만, 이기심은 받고 챙기기만 하지 남에게는 일체 내어놓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사랑은 자신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행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사랑을 주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을 헤아리기 전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영적 성장을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섬세하게 느낄 줄 알며, 자신의 내적 세계와 교감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외부상황에 지배되지 않고, 왜곡된 죄의식이나

솔직하지 못한 합리화, 자기 변명을 하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사랑을 살아가는 이들은 업보의 원리를 살아간다. 행위의 선택에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 평화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간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다 해도 그 상황에서 최선을 결정을 내리고, 아무리 밀려오는 중압감이 커도 긴장과 대면하여 서 있을 수 있다. 자기 신뢰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다른 이들의 비판이나 비평 앞에서도 인내하면서 일을 처리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는 우리에게 자유인이 되라 한다. 엔터니 드 멜로 신부는 "착한 이들을

만드려는 종교는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지만, 자유로움으로 초대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착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유로움이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내적 갈등을 다 부수어 버리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 보다는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가려고 애써라.

    결국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서로 비슷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자석은 같은 극끼리는 서로 붙지 않는다. 강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밀쳐내고, 잘난 사람이 잘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밀쳐내고,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밀쳐낸다. 서로 비슷한 그림자를 가진 사람들끼리는 서로에게 위협적인 인물로 비친다. 내가 나로서 행동하지 못하고 우리 안의 그림자가 주체가 되어 행동한다면 예민한 반응을 하게 된다. 전체적 자아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림자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다. 내 안의 그림자를 긍정적으로 전환시키려면 그 그림자에 의식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림자를 직면하고 의식할 때 그림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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