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샘터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 그 2편

인쇄

이요한 [jelka] 쪽지 캡슐

2004-04-07 ㅣ No.527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 그 2편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

   예수회.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 취득.     신약 주석학 박사. 현재 서강대학교 대학원 교수

 

 감정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인간은 누구든지 감정의 사슬에서 풀려나야 한다.

분노, 두려움, 슬픔, 후회의 감정에 젖어사는 것은

삶에 하등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쾌한 감정에 젖어 있으면 젖어 있을수록

쌓여가는 것은 원망뿐이요, 망가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슬픈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슬픔의 농도는 더욱 커져 나중에는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된다.

 

감정의 사슬에서 풀려나기 위한 몇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첫째,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소한 감정, 유치한 감정일수록

더 신경을 쓰고 받아들여야 한다.

감정이란 꿈틀거리는 사자와 같아서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격해지고

끝내 폭발하고 만다.

감정의 불꽃은 대단한 것이다.

작은 불빛이 방안 전체를 밝히듯이

작은 감정의 불꽃이 내 마음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면

영원히 그런 부정적 감정에 지배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감정에는 윤리성이 없다.

윤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행동,

나쁜 줄 알면서도 택한 감정적 행동이다.

아무리 부정적인 감정이라 해도

거부하거나 구박하거나 죄스러움으로

끌어가지 않고 인정해주고,

귀한 손님을 모시듯이 소중하게 다루면

긍정적 힘이 될 수 있다.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아하!’하는 체험이다.

 

자기 안에 도사린 감정들을 바르게 파악하고

’아하!"할 수 있을 때 변화와 치유가 시작된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 자기 감정에 귀를 기울인다면

자신을 위한 성장의 발걸음을 이미 내딛은 것이다.

 

   둘째, 파악된 감정을 표현하라.

자기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가 두려워서,

마찰이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자기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지 마라.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면 건강에 이롭다.

인간의 부정적 감정들을

하나하나 겉으로 표현하고 나면

그 고통이 한결 가벼워지게 되어 있다.

고통과 원한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누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을 흘려 버리는 것이다.

     

툭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의 진짜 감정은 분노가

아닐 수 있다.

자신의 슬픔, 두려움 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화를 냄으로써 위장하는 것이다.

잘 우는 사람도

진짜 감정은 슬픔이 아닐 수 있다.

화를 낼 용기가 없어서 눈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 표현이 파괴적이어서는 안된다.

야비한 말만 골라서 한다든가,

상대를 비난한다든가,

부정적인 감정을 아무데서나

충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는 것도 나쁘지만,

감정을 아무데나 아무렇게 터트리는 것도 나쁘다.

********************************************

   ’너 때문에’란 표현을 쓰지 않고

우리 안의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전달법’을 쓰면 된다.

예를 들어보자.

친구가 지난 번에 약속에 늦더니

이번에도 늦었다고 가장하자.

그때 "야, 너 지난번에도 늦더니

오늘도 늦게 오면 어떡하냐?" 라고 했다면

이것은 적절한 감정표현이 아니다.

 

"벌써두 번째나 기다리게 되니까,

시간도 아깝고, 얼마나 화나는지 몰라." 라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적절한 감정 표현이다.

 

(1)나를 괴롭히는 상대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2)상대의 행동이 나에게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을 설명한다.

(3)그 영향으로 인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 외로 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만약 내가 화를 내면,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정이나 친밀한 관계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 그 화를 솔직히 표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뒤에서 그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거나

엉뚱하게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화를 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갈등이란 인간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부산물같은 것이다.

 

    나의 부정적 감정과 내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불같이 화가 난다해도

그 화가 내 자신은 아니다.

지금 내 안에 깊은 슬픔이 있다해도,

그 슬픔이 나는 아니다.

지금 내가 실망하고 있지만,

실망이 내 자신은 아니다.

만약 내가 가진 부정적 감정과

내 자신을 동일화 시키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풀어가지 못하게 된다.

내 안의 부정적 감정 때문에

나의 인격자체를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상처받은 사람은

마치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자기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가 아플 때 누구를 생각하는가?

이가 아플 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상처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을 생각하기에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민감하게 반응하다 보면

또 다른 상처를 받게 된다.

상처가 계속되다보니 이제는 누구를 만나든

더 이상 다치지 않겠다고 자기를 보호하게 된다.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하다보니 여유가 없고

상대의 말 한마디나 행위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해진다.

상처의 악순환이다.

 

우리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예민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여유 있게 선택해야한다.

 

자유와 해방을 살아가는 최선의 길은

매 행위 때마다 깨어있으면서

선택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반응하게 되면 반응하는 그 만큼

우리는 평화를 잃는다.

 

하지만 반응하지 않고 선택한다면

우리는 상처를 덜 받으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용서를 삶에 적용하는 훈련

 

예수님도 사랑하는 우리에게 때론 상처를 주신다.

왜 그러실까?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이

이 책의 결론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다를 수 있다.

때로 이런 사랑이 세상의 사랑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상처는 우리 심령을 더욱 정화시켜주고

맑게 해주는 상처이다.

 

누가 각 사람이 받고 있는 상처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심리학적, 인간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우리가 받은 상처를 설명한다해도,

결국 각자의 상처에 대한 답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해야할 것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그 타는 요령을 설명하는 데는

일분도 채 안 걸린다.

하지만 그 설명을 이해했다고 해서

즉시 능숙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차례 넘어지면서 실수를 거듭한 뒤라야

자전거 타는 법을 체득하게 된다.

몸으로 배우게 된다.

----------------------------------------------------

자유인과 광야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위의 시에서처럼 어디에도 걸림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이다.

이 자유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고 싶어한

선물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광야에 선 인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로운 인간이 되려면 먼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후손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뒤

지름길인 해안길로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시고

시나이산으로 가는 광야길로 인도하셨다.

광야는 야곱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었다.

하느님은 불과 3일이면 약속의 땅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는데도

왜 굳이 돌아서 가야만 하는 광야길로 인도하셨을까?

왜냐면 광야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할 필연적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광야를 상상하면 황량하고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이렇듯 광야는 우리의 생을 지탱해줄

기본 조건들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 모두는 피조물로서

유한한 생명과 한계성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실존적 광야를 가지고 있다.

우리 안에는 영혼의 광야가 있다.

 

각 사람안에 있는 광야의 모습은 제각기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광야가 무엇인지 깊이 보고 깨닫는 것이다.

 

 



7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