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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교우촌을 찾아서] 1.쌍학리 교우촌(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2.우련전·곧은정 교우촌(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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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호 [kgh0727] 쪽지 캡슐

2006-09-13 ㅣ No.6950

[사라져가는 교우촌을 찾아서] 1.쌍학리 교우촌(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묵주기도 안하면 잠도 안재웠지"

“이곳은 신앙선조들이 피와 눈물로써 다듬은 교우촌입니다.”

그러나 집이 보이지 않았다. 인적도 끊어진지 오래된 듯 싶었다. 좁은 계곡을 한참동안 더듬어 올라 간신히 만난 교우촌(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1리). 1997년에 설치한 낡은 입간판만이 과거 이곳이 교우촌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교우촌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우촌의 정신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수원교구 비봉본당 김민호 신부는 “이곳만 해도 이농현상으로 젊은이들이 거의 떠나 몇몇 노인만이 간신히 교우촌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병구(안토니오.61) 교우촌 회장과 그 동생인 이한구(다윗.59)씨, 신영균(미카엘.63)씨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모두 아랫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들이 어릴 때 만해도 묵주기도를 하지 않으면 부모님이 잠도 재우지 않았어요.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 그랬어요.” 쌍학리 교우촌에는 한때 30호까지 생활했지만 지금은 이 회장 가족을 비롯해 3~4세대만 남아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신앙가족도 60대 이상이 대부분. 젊은 층은 직장을 좇아 모두 도시로 떠났다.

이병구 회장의 증조부 이선호(안드레아)가 신앙의 땅을 찾아 쌍학리에 정착한 것이 120여년전. 이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교우촌이 형성됐고, 함께 담배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쌍학리 교우촌은 이후 이선호의 아들 이의수(요셉.이병구 회장의 조부)에 의해 번영기를 누리게 된다. 라틴어와 불어, 의술에 능했던 이의수는 의술을 통해 선교활동을 벌였고, 당시 마을에 거주하던 대부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에 귀의했다. 이때 이의수에 의해 세례를 받은 신임(야고보)의 손자가 바로 신영균씨다.

“100년전만해도 유아 사망률이 높아, 아이가 태어나면 3일내에 교우촌 회장님이 세례를 줬어요. 우리들도 모두 그렇게 세례를 받았지요.”

신영균씨는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 교리서를 몽땅 외우고, 엄격한 찰고를 받으며 벌벌 떨던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아마 우리가 과거에 하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면 못할겁니다.” 이병구 회장의 동생 이한구씨는 “교우촌 식구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슬퍼했다”며 “함께 기도하고 생활한 과거 교우촌의 전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나마 지금의 교우촌 터도 지킬 수 없을 뻔했다. 10여년전 교우촌 터가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개발될 위기에 처했는데, 이상각 신부(현 남양성모성지 전담)의 안목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

김민호 신부는 쌍학리 교우촌 복원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교우촌이 사라지면 뿌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늦기전에, 교우촌의 기억을 갖고 있는 노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교우촌을 사적지화 해야 합니다. 신영세자나 예비신자들이 직접 이곳에 찾아와 과거 신앙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 잊은 것이 있습니다.” 김 신부가 신영균씨를 가리키며 “딸 셋을 모두 수도자로 봉헌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신씨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라며 부끄러워했다. 김 신부가 손을 내저으며 겸손해 하지 말라고 했다.

“만약 교우촌이 없었다면 세 딸이 과연 수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철저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신앙을 함께 살았던 교우촌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는 겁니다.” 외롭게 교우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세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우촌 순례 문의 : 비봉본당 031-355-2254


◎19세기 초 형성 … ‘이의수 회장’때 전성기
신앙 명맥 이어가는 쌍학리 사람들

고 한종호(베드로)씨는 ‘남양지역 천주교 전례과정의 고찰’에서 쌍학리 교우촌의 기원을 1800년대 초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생존한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구체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시기 혹은 전성기는 대략 1800년대 후반으로 보인다.

그 중심에 이의수(요셉.1888~1969) 회장이 있다. 처음 쌍학리 교우촌을 일구었던 이선호(안드레아)의 아들인 이의수 회장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 일찍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라틴어와 불어 등 신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성직의 길을 접고, 집으로 돌아온 이 회장은 이후 한의학을 배워 지역주민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이 때 담배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상당수 주민들이 이 회장의 후덕한 인품에 감화돼 가톨릭 신앙에 귀의 했으며 이는 쌍학리 교우촌의 전성기로 이어진다. 초창기 3~4가구에 불과하던 신자가구가 30여 가구로 늘어나며 쌍학리 일대가 신앙촌화 한 것도 모두 이 회장의 노력 때문이다.

이의수 회장은 이후 1969년까지 교우촌 회장 직분을 유지하며, 교우촌 발전을 위해 힘썼다. 이 회장은 기도생활과 성덕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마을에 길흉사가 있으면 늘 앞장서 문제를 해결하는 등 도움을 주었다.

한국 전쟁 때 행방불명된 이여구(마지아.1897~1950) 신부도 쌍학리 교우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신부의 조부 이상규(도마.1852~1937)는 내포지방 박해를 피해 경기도 산본 수리산에 이주했다가, 의왕을 거쳐 쌍학리로 왔으며 이때 이여구 신부가 부제품을 받았다.


사진설명
▶쌍학리 교우촌 입구에 붙은 안내문. 오늘날 교우촌은 사라지고 그 후손 3~4세대 노인 가구만이 아랫마을에서 교우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비봉본당 김민호 신부와 이병구 회장이 옛 교우촌 터를 둘러보고 있다.
▶쌍학리를 지키고 있는 신영균, 이병구, 이한구씨(왼쪽부터)가 교우촌의 부활을 기원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사라져가는 교우촌을 찾아서] 2.우련전·곧은정 교우촌(경북 봉화)
 ‘하느님 사랑’에 목숨도 버렸다

세상 영화 버리고 조밥에 소금으로 연명
신앙터엔 잡초만 무성 … 부끄러움 앞서

멀리도 왔다. 흔적을 더듬고 더듬어 찾아나선 긴 여정이었다. 서울에서 경북 영주까지 차로 3시간. 영주에서 봉화까지 30분. 봉화본당 정철환 주임신부를 만나 함께 차를 타고 길을 나선지 다시 1시간.

비포장 길을 쿵쾅거리며 어렵게 찾은 땅. 그런데 정작 눈 앞에 나타난 것은 ‘황무지’였다. 찾고자 한 땅에는 수풀만 무성했다.

▨ 우련전 교우촌

없었다.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우련전 교우촌에는 교우촌이 없었다.

200년전 신자들이 함께 모여 살며, 삶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그 흔적은 어느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신자들이 물을 길어 마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샘터와 공터만이 있을 뿐이었다.

1798년 충청도 솔뫼에 살던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가 이곳을 찾은 것은 1798년. 순교자 김진후의 셋째 아들인 김종한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전한다. 이후 김종한은 17년 동안 이곳에서 살며 철저하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이어나간다.

10여년전 우련전 교우촌을 발굴한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클레멘스) 부소장은 1999년 ‘빛’잡지 기고문에서 “김종한 안드레아는 당시 조밥에 소금을 얹어 먹을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며 “신자들을 가르치는 일과,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데도 열심이었던 신앙 선조들의 삶이 점차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어려웠던 시절. 하지만 신앙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신앙 안에서의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19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안동진영 포졸들이 우련전으로 와서 김종한을 체포한 것. 김종한은 이후 온갖 고문 속에서도 배교를 하지 않다가,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치명했다. 경상 감영의 첫 순교자였다.

특히 그는 감옥에서도 모범된 신앙생활을 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 신앙생활을 이끄는 등 의연함을 보였다고 전한다.

남은 가족과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마 부소장은 칠곡 한 골짜기에서 얼마간 살다가 고향인 충청도로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우련전 교우촌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우리의 기억속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10여년전 마 부소장이 우련전 교우촌을 발굴할 당시, 70~80대 노인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증언을 해줄 이들도 없다.

“이곳에서 신앙선조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먹을 것이라도 제대로 있었을까. 이곳을 다시 되살려, 신앙선조들의 신앙을 다시 되살리고 오늘날 신앙 공동체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봉화본당 정철환 주임신부는 한참동안 교우촌 터를 바라보았다.

▨ 곧은정 교우촌

우련전 교우촌에서 다시 차를 타고 30여분을 달렸을까. 나무는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길은 비포장이었다. 억새가 길을 막았다. 오랜기간 사람의 왕래가 없었다는 표시였다. 핸드폰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험한 길 끝자락에서 너른 공터를 만났다. 천혜의 요새였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오지였다.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숨어들기에 안성맞춤이겠다 싶었다.

곧은정 교우촌은 경북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와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경계지역에 있다. 우거진 갈대밭 속으로 여기저기 돌무더기들이 보였다. 흙에 덮힌 구들장과 굴뚝도 발견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었다. 신앙 때문에 죽음까지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들의 흔적이다.

200년전. 충청도 여사울 사람으로 중인계급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김경서(희성, 프란치스코)가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 김광옥(안드레아)이 순교한 후,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열정 하나만 간직한 그였다. 가지고 있던 재산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빈손으로 산을 일군 김경서는 나무 뿌리나 도토리로 연명하면서 금욕생활을 했다.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대재를 엄수했고, 매일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다가올 죽음을 준비했다. 1815년 3월 그 날이 온다. 배교자 전지수가 안동 포졸들을 데리고 그의 집 앞에 나타난 것. 그는 포졸들과 배교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고, 어머니에게는 하직을 고한 뒤, 포졸을 따라 나섰다.

아내에게는 “어머님을 잘 봉양하고,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 때가 되면 나의 뒤를 따르라”는 부탁을 남긴 뒤였다. 안동에서 고문을 받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김경서는 1816년 관덕정에서 참수된다. 당시 나이 52세였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부귀영화를 버리고 이곳에 와서 가난하게 사셨나요. 그리고 그토록 의연하게 체포돼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요.”

기도가 절로 나왔다.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날이 어둑해 지고 있었다. 잡초 무성한 땅을 뒤로하고 오던 길을 거슬러 왔다. 교우촌을 뒤덮기 시작한 땅거미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함께 동행한 일행들은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잊혀진 교우촌, 우련전과 곧은정의 길안내를 도와준 김용기(베드로·69)씨가 말했다.

“함께 살고, 함께 기도한 과거에는 냉담자가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었어요, 요즘 신앙생활은 너무 편하지 않습니까? 신앙 선조들은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 교우촌 신앙의 전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교우촌 성역화 후원 문의 : 봉화본당 054-673-2134

사진설명

▶옛 교우촌 진입로. 곧은정 교우촌을 찾아가는길. 억새 등 무성한 수풀을 헤쳐가야 하는 험한 길이다.
▶봉화본당 정절환 주임신부(가운데) 와 본당 관계자들이 우련전 교우촌 터에서 과거 샘터를 확인하고 있다.
▶곧은정 교우촌 터. 옛 신앙촌의 흔적은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채 방문객을 맞는다.



우광호 기자 woo@catholictimes.d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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