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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때문에 고민하는 교우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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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규 [marco1998] 쪽지 캡슐

2011-01-28 ㅣ No.7329

고해성사의 올바른 이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잘못 이해하여 지나친 두려움에 빠져 있거나,

고해성사를 기피하여 신앙생활을 쉬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혹은 개신교 신자들의 억지 주장이나 그릇된 성경해석에 정신을 빼앗겨

완전히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이 글은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님께서 고해성사를 두려워하거나,

잘못 이해하여 고해성사 보기를 꺼려하는 교우들을 위해 연구하신 글입니다.


우리 교우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옮겨 실어봅니다.


1)고해성사에 대한 개신교의 주장.

루터는

고해성사를 평신도가 직접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는 것을 방해하는 하나의 장애요인으로 보았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말하며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면 성경에도 어긋나고 하느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니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합니다.


요한 1서 1장 9절에는 죄를 고백하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데

사실 누구에게 고백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실 때에도 그의 죄를 듣고 사해주신 것은 아닙니다.(루카 5,24)

그들은 베드로에게 주신 하늘나라의 열쇠는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여 받았듯이,

모든 믿는 이들이 복음을 전할 때 받는 것이지

베드로나 사제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죄 사함의 권한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21-23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시며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해 질 것이라고 한 것은 모든 복음을 전하는 신자들에게 한 말이지

특정한 몇 명의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하듯이

용서는 다른 이를 용서하는 데서 얻는 것이고, 야고보서 5,16절에는 죄를 서로서로 고백하라고 했는데

왜 사제에게 고백해서 죄를 용서 받아야 하느냐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루카 18,14절에서

세리는 겸손하게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여 죄를 용서받고 돌아갔다고 나오는데

왜 사제에게 고백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2) 보편교회의 고해성사 이해

사실 고해성사는

신자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통교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듯이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즉 아담과 하와의 죄로 저주받은 땅에는 사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깨끗해야 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를 지었다는 말은 이미 하느님과 멀어졌다는 뜻인데

어떻게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미국에 있는 사람이 한국에 있는 사람과 아무런 중간 매체도 없이 이야기나 통교가 가능합니까?

사실 하늘과 땅은 한국과 미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습니다.


죄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당연히 하늘나라에 사시는 그 분과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직접 하느님을 만나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굳이 인간 세상에 오시어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를 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없어서 그 중간에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통해서만

성자께서 사람이 되실 수 있으셨듯이, 모세와 같이 누군가가 중재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인간 사이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죄인인 상태에서 하느님께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직접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죄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 또한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으려고 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 것을 거부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잉태하고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되는 은총을 받았을 때

“내가 감히 어떻게 하느님을 잉태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시지 않고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어떻게 감히 내가?”라고 거부하셨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수 없었던 것처럼,

그런 마음 때문에 참다운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려는 것을 거부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어떤 부분도 나누지 못할 것이다.”(요한 13,8)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 22-23)

이 말씀은 분명 예수님께서 당신만이 가지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 제자들(요한 20,19)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제자들’이라고 쓰는 경우에는 보통 신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쓰는 말입니다.

즉 특정한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죄 사하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셨다고 하는데,

이는 하나뿐인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이

모든 신자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도 사람의 권한이 아닌 것처럼,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것도 사람의 권한이 아닙니다.

만약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모든 신자들에게 있다면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며,

동시에 ‘특정한 당신이 손수 뽑으신 제자들’에게만 “성령을 받아라.”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령의 특별한 은사 없이는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19)


하늘나라의 열쇠는 먼저 베드로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권한은 베드로와 일치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먼저 주셨던 이유는

제자들이 베드로와 일치하게 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도록 섭리하신 것이고,

그 교회에 당신의 모든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즉 교회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듯이,

다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한인 하늘나라의 열쇠는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 것입니다.


요한 1서 1장 9절에서 죄를 고백해야 하는 대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요한이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죄를 고백하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죄를 고백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요한 1,8)

물론 지금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지금도 몇몇 성당세서 잘못 행해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소위 공동 고해성사입니다.

개인적으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개인적인 사죄경을 받지 않으면 고해성사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고해를 듣지도 않고 그를 사해주신 것은,

죄를 사하는 권한과 병을 치유하는 권한이 같은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임을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사람의 마음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신데

그 고생하며 거기까지 온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셨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에게 병을 치유하는 권한을 성령님을 통행 내려주시는 분이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내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형태는 다르지만 이 모든 은사들은 같은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2,1-12)

사람에게 치유의 은사를 주셨다면 동시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은 같은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 죄를 용서하게 해 달라면서 이웃을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정의상 우리를 용서할 수 없으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지

이것이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마태 18,23-35 참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한 사람 위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신 것이고, 그 교회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도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는 종처럼 되지 말고

서로서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5,16절에서 서로서로 죄를 고백하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서로서로 겸손해지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상태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면, 상대의 죄 또한 용서해주기 어렵습니다.

사제가 고해성사를 줄 때,

신자들의 고해를 잘 들어줄 수 있는 방법은 먼저 나도 큰 죄인임을 고백하는 길 뿐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나서 더욱 겸손해졌고, 더욱 용서해주는 마음이 커졌을 것입니다.

이런 부족했던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 더 잘 용서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루카 18,14절에서 세리가 기도만 드리고 의롭게 되어 돌아갔다고 하는데,

사실 교회에서도 개인적으로 용서받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사 때, 혹은 개인적으로 양심성찰을 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용서를 청할 때,

우리의 작은 죄들은 충분히 용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기 같은 것들은 저절로 치유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중병에 걸린 사람이 의사 없이 혼자서 치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중대한 병은 반드시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또한 겸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교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죄의 용서는 겸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 겸손을 보이는 길이고 벌써 그렇게 죄의 용서가 시작됩니다.

사제 앞에서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사제를 통하여 천주 성부께 고백하는 것이고,

죄의 용서도 사제가 해 주지만,

사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아야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고 하느님을 볼 수 있으며,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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