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5월16일(2월22일)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축일♬Viderunt Om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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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2-20 ㅣ No.976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도나텔로(Donatello)

1454년-1455년.목조.높이 187.9㎝ 피렌체 대성당 미술관

 

 

축일 : 5월16일(2월 22일)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St. Margaret of Cortona 통회자, 1297년. 프란치스코 3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서 5,20)

 

어느 날 예수님께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사이에게 초대를 받아 만찬을 같이 할 때 더러운 죄인으로 세상 사람에게 배척을 받고 있는 한 여인이 들어와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발에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것을 본 주인은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저런 여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는가 하고 이상히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본 예수께서는 "이 여인은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하고 말씀하셨다.(루가7,36-50)

 

코르도나의 마르가리타도 은총의 빛을 받고서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고 많은 죄의 용서를 받고, 여러 가지 고행으로 전죄를 보속하고 덕행을 많이 닦아 새롭게 된 성녀이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코르토나의 근처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가난했지만 선량한 백성이었으며 마르가리타는 시골 처녀로서는 볼 수 없게 영리했다. 그녀의 얼굴은 일찍부터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불행하게도 친어머니는 그가 아직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아버지는 후처를 얻게 되었는데, 마르가리타는 계모(繼母)의 학대에 못 이겨 17세 때 집을 나와 몬테브르자노 성(城)에 하녀로 들어갔다.

 

성주(城主)인 공작(公爵)은 미모의 마르가리타를 여러 가지 감언으로 꾀어 마침내 그녀를 자기의 처로 삼았다. 그는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고는 9년 동안이나 이행하지 않았다. 마르가리타는 양심도 마비된 것과 같이 이런 부당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자녀까지 낳았다.

 

그 후, 그녀는 마치 죄녀의 대명사처럼 불렸고, 천시를 당하였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빛으로 죄악의 암흑에서 헤매는 그녀의 영혼을 각성시켰다.

 

어느 날, 그녀는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풀속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공작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마르가리타의 마음은 형용키 어려운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이 처참한 모습을 보자마자 하느님의 심판을 절실히 깨닫고, 몬떼풀치아노를 떠나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이 때 처음으로 현세의 허무함을 확실히 깨달았던것이다.

 

"아! 이 사람의 영혼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같은 생각을 할수록 그녀의 가슴에는 과거에 범한 많은 죄가 솟아올라 자기 영혼의 캄캄한 장래에 대해서 무서움에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사건을 기회로 흙구덩이와 같은 생활에서 발을 씻고 아무리 어렵더라고 바른 길로 돌아가서 지금까지의 죄의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굳을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그 날 밤 즉시 어린 아들을 안고, 고행 복장을 한 채로 성을 떠나 밤새도록 걸어서 이튿날 아침 아버지의 집에 당도했다. 그러나 계모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죄녀로 멸시받고 있는 그녀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그리하여 마르가리타는 그곳에도 있을 수가 없어 몸도 의지할 곳 없는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양친에게도 버림받은 신세인데 짧은 인생을 향락으로 재미있게 지내 버릴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지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마귀의 유혹이다.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야 될 말인가? 너는 그처럼 굳게 결심한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후 마르가리타는 코르토나의 프란치스코회의 성당에 들어가 뜨거운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오랜만에 모든 고해를 하고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은 후, 친절한 고해 신부의 권고에 따라 한 칸 짜리 누추한 집을 빌려 아이와 같이 살면서 엄격한 고행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에게 악한 표양이 된것을 보상하기 위해 어느 주일, 성당문 앞에 서서 그곳에 모인 신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의 용서를 청하고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내놓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껏 때려달라고 간청했다. 이러한 일은 예사로운 결심으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의 이러한 비장한 결심의 태도는 모든 이들을 감동시켜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마르가리타는 더욱 보속을 철저히 실행하기 위해 ’통회의 프란치스코회’라 불리는 재속 3회에 입회할 것을 열렬히 원했지만, 죄녀라는 이유를 들어 허락받지 못하다가 3년이 지난 후 입회가 허락되어 철저한 보속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탄이 그녀의 통회를 방해하니, 기도와 고행의 무가치함을 보여주며 실망시키려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행,보속의 노력과 열성은 날이 갈수록 더 증가되어 심한 악마의 유혹에도, 병환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주저함이 없이 가시덤불에 싸여있는 것 같은 통회의 험한 길을 바로 걸어나갔다.

 

그와 같은 탄복할 만한 정성이 자비 깊으신 예수의 성심에 통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주님은 그녀를 따뜻이 안아 주시고, 관상의 은혜와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은총을 주셨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 옛날 시몬의 집에서 죄 많은 여인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신 주님께서는 마르가리타에게도 몇 번이고 발현하셔서 육신과 영혼이 녹아 없어질 정도록 천상의 위로를 내려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참된 표양으로 인해 회개한 죄인은 코르토나 읍내만 하더라도 상당한 수에 달하며, 일반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열의도 놀랄 만큼 높아졌다고 한다.

 

그녀는 통회생활을 시작한 지 23년 되던 해인 1297년 2월 22일에 50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는 완수할 것을 온전히 완수한 안심된 기색이었고 입에는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녀는 "프란치스꼬회의 성녀 막달레나"로 불린다.

 

그녀의 유해는 코르토나의 성 프란치스꼬 성당에 안장되어 있는데,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존되어 있으며,이상하게도 그 유해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고 한다

 

★수도회에서는 축일을 5월 16일로 지낸다.

 

★성녀 마리아막달레나 축일:7월22일, 게시판546번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도나텔로(Donatello)

1454년-1455년.목조.높이 187.9㎝ 피렌체 대성당 미술관

 

이 작품은 도나텔로의 말년의 작품으로 고전미의 감각과 성서 설화의 이해, 인체의 해부학적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전미와 발랄한 생기와 관능미를 버리고, 꽃처럼 시들어 추한 육체와 함께 기독교적 회개 속에 구원을 찾는 인간상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그의 목조각상〈마리아 막달레나 〉는 젊은 날의 아름다움은 온데 간데 없고 몸을 덮은 긴 머리가 칡 넝쿨처럼 엉키고,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진 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난과 참회의 노파(老婆)이다.

 

맨발에 이도 다 빠져버린 죽음 직전의 불쌍한 마리아 막달레나가 경건히 두 손을 모아 참회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처연하다. 젊은 날 향수로 예수의 발을 씻기고 고운 머릿결로 닦아주었던 여인은 이제 육체의 죽음으로 영혼의 삶을 얻었다. 도나텔로는 그녀의 기구한 말년의 모습을 깊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조각품으로 승화 시켰다.

 

♣도나텔로(Donatello)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조각가이며 미켈란젤로 이전의 가장 훌륭한 조각가인 도나텔로는 1386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로마로 건너가서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대리석, 사암(砂岩), 목재, 청동등 재료를 가리지 않고 제작하였으나 초기에는 주로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었고,1420년경부터는 특히 청동 조각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여 주었다.

 

30세 때 (1416년)에오르산미케레(OrSan Michele)성당의 〈성 조르조〉 입상(立像)은 현재 피렌체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443년에는 파도바(Padova)에 초청되어 성 안토니오 성당의 제단을 장식하였고, 1446년 이후에는 성당 앞 광장에 있는 청동 기마상〈가타 멜라타〉를 제작하였다.

 

도나텔로의 가장 유명한 초기 르네상스의 걸작은 1440년경에 코지모 메디치를 위해 만든 〈다비드〉상이다.

 

그의 작품은 고대 조각의 형식과 초기 르네상스의 사실적인 표현 경향과의 결합 속에 15세기 조각의 발전을 반영하고 있어서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Viderunt Omnes - 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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