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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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길 [fcan] 쪽지 캡슐

2004-09-05 ㅣ No.3564

연중 제 23주일 (2004-09-05)

독서 : 지혜 9,13-18 독서 : 필레 8ㄱ,10.12-17 복음 : 루가 14,25-33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그때에 예수께서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 하고 비웃을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만일 당해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루가 14,25-­33)

◆예수께서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당신 곁에 있게 하시기’(마르 3,14)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로마에서 공부할 때였다. 어느날 친구 신부와 이야기하던 중에 그 친구가 ‘버스를 탈 때 버스표 두 장을 냈다’고 하였다. 그래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기 것과 예수님 것을 냈다’고 말하였다. 이 정도 되면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친구 신부의 순수함이 참 부러웠다. 이 친구 신부처럼 늘 예수님을 동행한다는 의식을 갖고 지내는 것이 곧 관상생활이요, 예수님의 현존 속에 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오로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라고 했고,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과 늘 함께 산다는 것, 곧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목표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동행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예수님을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하신 분이 어떻게 미워하라고 하시는가? 그것도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사랑해야 할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얼핏 들으면 서로 모순되는 말씀 같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주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살려면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의 기준은 사랑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미워하다’는 말은 정말 미워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을 동행하는 데 장애가 된다면 미워하라는 말이다. 곧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은 포기하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형제·자매라 하더라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미워해야 한다. 다시 말해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동행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분도 또는 그 어떤 것도 예수님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십자가가 없는 쉽고 편한 삶이 아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라고 말씀하셨듯이 험한 길이며 고난의 길이다.
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가? 십자가는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1고린 1,`18)라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는 지혜이며 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바로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구원받아야 할 나에게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이다”. 구원의 수단인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지 않는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예수님을 동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나도 한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그냥 덜렁덜렁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이제는 나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세 번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고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고 입어야 할 예복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둘째, 예수님 이외에 그 누구도 따라가면 안 되며 셋째, 자기 십자가를 반드시 지고 따라가야 한다.
누구든지 이 세 가지 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면 이 세 가지 조건을 채우도록 좀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영성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먼저 앉아서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듯이,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듯이 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 삶인 예수님을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나아가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는지 아닌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김해인(수원교구 권선동 천주교회)

- 아름다운 순간들 -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 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흔들며,
때로는 텅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 이해인의 詩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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