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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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10-05 ㅣ No.2088

 

72. 남경문 베드로, 회장(南景文, 1806∼1846) 장살

 

남경문 베드로는 서울의 중인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1801년 신유박해 전부터 천주교인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그에게 신앙을 전해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20세 때에 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서야 입교하게 되었다. 이 때 그를 권고한 사람이 박 베드로였기 때문에 자신도 베드로라고 한 것이다. 처음에 그는 금위영의 병정노릇을 하다가, 후에 조개젓 장사를 하였으며, 스물두 살 때에 허 바르바라와 혼인하였다. 처음에는 교리를 자세히 몰랐으므로 비싼 이자를 받는 돈놀이를 하였으나, 유방제 신부로부터 그런 일은 교회가 금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대금업을 패하고, 신부를 따라 공소 방문을 다녔다. 이러한 열성으로 그는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기해박해 때에 베드로는 포졸의 손에 잡힐 뻔하였으나 외교인 형제들의 도움으로 겨우 난을 면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후 선교 신부와 신자들이 모두 순교하자 혼자 남아 2,3년 동안 스스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스스로 지난날을 뉘우치고 다시 열심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으면서, 친구들에게 "이런 죄를 범하였으니 천국에 가려면 순교를 해야 하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해 돋기 전에 일어나 오랫동안 기도하고, 보속하는 뜻으로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 남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포졸들은 그를 쉽게 체포하였는데 포졸들이 그를 끌고 가려고 할 때, 그의 아내가 팔에 매달려 "당신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이오?" 하며 붇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 틀렸오. 나는 이 이상 더 살 수 없소"하고 아내를 물리쳤다.  베드로가 포청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형제 하나가 그를 만나 보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 음식과 옷을 들여보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옥안에서 얻어먹는 음식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내게는 과하니 다른 것을 더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이르게 하였다. 한번은 문초 중에 허리춤에서 군사의 패를 떼어포장에게 바치며 "나는 천주께서 창조하신 물건으로 오늘까지 살아 왔고 또 나라에서 쌀도 많이 받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는 길밖에 없으니 군사의 패를 도로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포장이 "네가 배교만 한다면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네 직업도 잃지 않게 해주마"하고 약속하였으나 베드로는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포장이 명하여 곤장으로 때리는데 어찌나 혹독하게 쳤던지 어깨 위에서 곤장이 부러져나가기까지 하였다. 관리가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재촉하자 그는 죽은 사람의 몇 댈 뿐이었다. 형리들은 양 손목을 잡아매어 공중에 매달고 채찍으로 마구 갈겼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런 매질을 이기지 못하여 숨을 거두니, 때는 1846년9월20일이요, 나이는 40세였다.

 

 

 

73. 우술임 수산나, 과부(禹述任, 1803∼1846) 장살

 

우술임 수산나는 경기도 양주에 살던 어느 양반집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열 다섯 살 적에 인천에 살던 어느 신자에게 시집을 가 남편의 권고로 입교를 하여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1828년 한 번 잡혀 사형선고를 받을 뻔했으나, 마침 해산이 임박하였으므로 몇 주일 동안 갇힌 생활 끝에 풀려 나왔는데 이때 받은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일평생을 고생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후 남편을 여의고 서울로 올라온 수산나는 여러 교우 집으로 다니며 하인 노릇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덕행이 뛰어나 사람들의 눈을 끌게 되었다. 그녀는 기도에 전념하였으며, 천주를 사랑하는 뜻으로 천한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녀는 늘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만 순교할 기회를 놓친 것뿐이다"라고 하였는데, 하느님 섭리로 그 기회를 다시 얻게 되도록 기도하였다고 한다. 1846년 병오박해 때에 수산나는 여교우들과 함께 석정동의 김대건 신부 댁에서 생활하고 있다가, 김신부가 체포됨으로 이 아가다의 집에 있다가 그와 함께 잡혔다. 포청에서 수산나는 치도곤, 태형, 주리 등 혹형을 당하였지만 배교한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매질하라는 명령에 따라 수 없는 매를 맞고 결국 44세의 나이로 순교하니, 때는 1846년9월20일이었다.

 

 

 

74. 김임이 데레사, 동정(金任伊, 1811∼1846) 장살

 

김임이 데레사는 서울 관우물골의 어느 신자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데레사는 열심히 계명을 지켰으며, 성인전 읽기를 좋아하고, 그 덕행을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이미 열 일곱 살 때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으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남을 도와주고 자기 영혼들 구하는 것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여교우들이 임종할 때에 선종 하도록 도와주고, 죽은 후에는 장사 지내는 일과 그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직분처럼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활함으로써 데레사의 집안과 친한 이웃 사람들은 그녀가 결혼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판단한 그녀는 몸을 피하기 위하여 왕비궁의 침모로 들어가 3년 동안 살았다. 그 후 궁궐에서 나와 20세가 되었을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동안 오빠인 김 베드로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그 뒤에는 친척이나 혹은 친지의 집을 찾아다니며 살았는데 특히 이문우(요한)의 양모집에 가 일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1844년, 데레사는 김대건신부의 식모로 들어가게 되었다. 1839년부터 1841년까지 박해를 체험한 신자들은 새로운 박해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불안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였으나, 그녀는 오히려 순교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 듯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언제고 신부님이 잡히시면 나는 자수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부님 뒤를 따를 테니 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나하고 갈 생각은 하지 말라." 잡히기 전날 데레사가 동생을 만나러 갔는데, 동생이 밤을 지내고 가라고 붙들자, 데레사는 "안된다. 현까를로 회장님과 여러 교우들이 새 집에 바로 오늘밤에 모여서 일을 의논하기로 했으니까 꼭 가보아야 한다" 하며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날밤, 데레사는 현까를로의 집에서 다른 여신자들과 잡혀 온갖 고문을 받았다. 옥중에서도 그녀는 가장 용감하였고 같이 있던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라고 여러 번 권고하였다. 그러던 중 데레사는 혹독한 매질을 이기지 못하여 순교하니, 때는 1846년9월20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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