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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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10-06 ㅣ No.2093

 

75. 이간난 아가타, 과부(李干蘭, 1813∼1846) 장살

 

이간난 아가타는 서울의 어느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 여덟 살 때 시집을 갔으나 3년 후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혼자 생활하였다. 1834년에야 비로소 천주교 이야기를 들은 후, 그녀는 재가하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신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간청하였다. 다행히 친척 중에 신자 한 명이 있어 쉽게 원을 풀 수가 있었다. 이 친척이 아가타와 그 어머니와 오라비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여 믿게 하였고, 유방제신부에게서 성세를 받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는 천주교를 매우 싫어했는데, 집안 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알자 크게 노하여 아내와 아들은 경상도로 쫓아버렸고, 아가타는 남편이 죽고 없는 시집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아가타는 아버지의 뜻대로 남편 없는 시집으로 되돌아가서 온순하고 친절하게 시집 식구들을 대한 결과, 시집 식구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며, 시누이 한 사람까지 입교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집에서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으므로, 아가타는 약간의 돈을 모아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사서 가까운 여교우들과 함께 이사하였다. 이사한 집에서는 아가타는 열렬한 신앙으로 여러 가지 고신 극기를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자주 단식하여 신자들로부터 "거울과 같이 맑고 눈과 같이 희다"는 평판을 들었던 것이다. 1846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얼마동안 자신의 집에 숨어 지냈으나, 7월15일에 현까를로의 집에 있다가 우수산나, 김데레사, 정까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아가타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은 채 포졸들에게 "우선 내 집에 가서 옷가지를 가지고 떠납시다"라고 할 정도로 순교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당해야 했던 고문과 형벌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어느 증인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한동안 배교의 유혹을 받아 약간의 내적 동요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인내하여 마지막으로 곤장 50대를 맞고 순교하니, 때는 1846년9월20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33세였다.

 

 

76. 정철염 가타리나, 부인(鄭鐵艶, 1817∼1846) 장살

 

정철염 가타리나는 '덕이'라고도 불렀다. 그녀가 노비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영세하였다 는 사람도 있고, 16∼18세에 이르러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느 증언이 정확한 지는 분간하기 어렵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의 성격은 매우 온순하였고 재질은 보통이었으나 마음은 매우 용감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녀의 나이 스무살 되던 해 동짓날, 그녀의 집주인인 김씨가 미신행위의 참여를 강요하자, 가타리나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크게 노하여 가타리나의 두 팔을 뒤로 결박하고, 몸에는 큰 맷돌 을 매달아 장작더미에 처박아 두었다가, 제사가 끝난 다음에 끌어내어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마침내 기절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4,5주일 뒤에야 회복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춘분 제삿날이 오자 다시 미신행위에 참여하라는 주인의 명을 어긴 죄로 전보다 더욱 심한 곤욕을 치렀다. 결국, 가타리나는 이 두 차례의 형벌로 인하여 일생동안 몸이 붓고 얼굴은 누르스름하였고 힘든 일은 거의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병이 나은 뒤에 가타리나는 주인집을 몰래 빠져나와 서울로 가서, 어느 신자 집에 몸담아 살며 안온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5년 김안드레아 신부 댁의 하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병오박해로 신부가 체포되자, 그녀는 현까를로회장이 마련한 새 집에 있다가 7월10일에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된 것이다. 가타리나는 우수산나, 김데레사, 이아가타와 같이 옥에서 매를 맞고 순교하였는데, 때는 1846년9월20일이고,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

 

 

77. 류정률 베드로, 회장(劉正律, 1836∼1866) 장살

 

류정률 베드로는 평안도 윤리면 논재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되었는데, 호구지책으로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또 어쩌다가 돈이 조금 생기면 노름판에 뛰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이덕표라는 친척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그후 교리를 배워 서울에 계시던 장 베르뇌 주교로부터 1864년경에 영세 입교하였으니, 그가 순교할 때까지의 신앙생활이란 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열심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영세 받은 후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노라"하며 자신의 기쁨을 큰소리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성격이 급했던 그는 자기 아내가 고집을 부리고 대들면 참지 못하여 부부싸움을 하고, 또 다투다가 아내를 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가 영세한 뒤로는 아내를 때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짚신처럼 생긴 나무토막을 가지고 자기 몸을 사정없이 때리고 때로는 피를 흘려가면서 자문자답 하기를 "너 아프지? 네가 아프면 또한 네가 때리는 남도 아플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옆에 있는 부인도 크게 달라진 남편을 보고 감화를 받아 마침내 착하고 상냥한 아내가 되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류베드로의 마음속에 점차 신앙의 열이 더해감에 따라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어 영세 입교시켰다. 1866년 초, 그는 친척집을 찾아다니면서 "평안히들 계십시오..오늘가면 언제 다시 뵐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고별인사를 하여 듣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렵에 그는 공소가 있는 고둔리라는 마을로 가서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새해 인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밤에는 유달리 교우들이 많이 모였기에, 회장이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교우들은 당연한 듯 조용히 체포되었으나, 마침 그날이 설날이었으므로 포졸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틈을 이용하여, 많은 신자가 피신하고 류베드로와 몇 명의 신자만 남아 포졸들에게 잡혔다. 포졸들과 먼길을 가는 동안 류베드로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도다."하며 마냥 즐거워하면서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한결같이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심한 곤장으로 맞고는 4명이 배교하고, 류베드로와 정회장만이 남았다. 또 그 얼마후 정회장도 친구들과 배교자들을 따라가니 결국 류베드로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러자 화가 치민 감사는 배교자들을 불러들여 곤장을 주면서 류베드로를 쳐죽이라고 명을 내리니, 배교자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류베드로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류베드로는 자기를 때리는 동료에게 "살이 살을 잡아먹는구나"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후 배교자들은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시신을 대동강물에 버렸는데, 얼마후 붉은 피가 물위로 번져 나갔고, 신기하게도 그의 시체는 가라앉지 않고 언제까지나 둥둥 떠 있었으며 매맞은 자리는 이상한 광채가 나며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때는 1866년2월17일이며,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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