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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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10-08 ㅣ No.2101

 

81. 정의배 마르코, 회장(丁義培, 1794∼1866) 군문효수

 

정의배 마르코는 서울 창동의 어느 양반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진실하고 행동이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은 유학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사서오경을 외우며 과거공부에만 열심하였다. 과거 공부를 마친후 서울의 어느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안돼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도 없이 홀아비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땅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새남터에서 보게 되었다. 이국 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날뛰며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붓는데 오히려 웃는 낯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이처럼 그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가 닦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껏 나는 천주교 신자가 되면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었지만 이제 알고 보니 진정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세 입교하여 조선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니,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845년 입국한 페레올 고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죽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신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기에 "산 聖人"이라 할 정도로 신자들을 잘 이끌고, 예비자들을 잘 준비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 고생하면서도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가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는데 그에게 값진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고, 군데군데 깁고 또 기운 헌옷을 입었고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조금 들다가 그만 밥상을 물리곤 하였다. 그는 백 브레터니르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어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1866년2월2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으나 의금부로 넘겨졌고, 3월6일에는 사형선고가 내리고, 11일에 처형되었다. 사형 길에 나선 정회장은 눈을 내리 뜨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이윽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66년3월11일이고, 그날은 바로 그의 72회 생일이었다.

 

 

 

 

 

82. 우세영 알렉시오, 번역가(禹世英, 1844∼1866) 군문효수

 

우세영 알렉시오는 세필이라고도 불렀는데, 황해도 서흥땅에서 대대로 선비생활을 하던 양반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만난 김요한이라는 전교회장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삶의 의의와 보람을 느끼게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였는데,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외면한 채 집을 나와 몇몇 예비신자들과 장 베르뇌 주교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를 만나본 장주교는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위 환경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선뜻 세례를 주지 않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하였다. 결국 그는 정마르코 회장의 인도를 받아,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막상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천대가 대단할 뿐 아니라 수 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고, 마침내 남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를 감금까지 하였지만, 그는 모든 것을 양순과 인내로써 잘 이겨냈다. 그후 그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은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지 모른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집을 떠나 서울의 정마르코 회장 집에 일년동안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리서 번역과 십이단 편찬에 전력하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버지도 아들의 천주교에 관심을 보임으로 그가 차근차근 천주교 진리를 설명해 드린 결과 온 가족들과 이웃 등 20여명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대한 고발 소동이 일어나자 하는 수 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후 1866년 정초에 알렉시오는 정마르코 회장을 찾아가 세배를 하였는데,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와 정회장을 잡아갔다. 처음 심문과 고문을 잘 참아 받았으나, 두 번째에는 위협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 그러나 곧 참회와 식음을 전폐하는 극기를 통해 마음을 다시 굳히고 포도청으로 나아가 옥중에 있는 장주교에게 지난 일들을 사죄받았다. 이윽고 그는 평온한 마음을 되찾고 용덕을 더욱 발휘하여 모든 고문을 잘 참아 견디었으며 혹심한 곤장과 많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용감하게 고수하여 기다리던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윽고, 우알렉시오가 1866년3월11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83. 장주기 요셉, 회장(張周基, 1802∼1866) 군문효수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고,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왔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신부는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땅 배론 골짜기에 살았다. 1856년 장 베르뇌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자기 깁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 하였다. 그들 부부는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 11년 간이나 신학교 살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3월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신 뿌르띠에 신부가 관헌에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하여, 하는 수 없이 그는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 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근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3월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2월8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니,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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