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이성선
말씀 없는 당신 말씀이
하늘에 소리 없이 피었습니다
얼굴 없는 당신 얼굴이
들판에 작은 풀꽃으로 웃습니다
당신은 멀리 있는 듯하지만
당신은 안 보이는 듯하지만
하늘을 보면 걸어오고
들판에 서면 향기가
발을 적십니다
새를 숨기고
솔잎 끝에 별을 빛내고
잎 떨어진 나무 가슴으로
달을 껴안으며
물소리 울리는 돌 뒤에서
낙엽 뒹구는 숲 뒤에서
해지고 난 지평 너머에서
당신은 발자국소리로 오십니다
사랑의 울음으로 오십니다
나의 고독을 깨우시고
내 몸의 귀를 열어
텅 빈 들에 홀로 세우십니다
이 가을날 더욱 멀리 있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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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극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 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 주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서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