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예수와 만난 사람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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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3-12-13 ㅣ No.9893

 

 

개가 된들 어떠랴

 

 

나의 고향은 페니키아, 그리스인의 핏줄을 이어받아 태어났다. 사람들은 나를 일컬어 페니키아 과부댁이라고 부른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나는 어린 딸과 함께 험한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남들은 참 쉽게도 살아들 가던데 나에게는 사는 것이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마을에서 나는 극성스런 여자로 소문이 났다. 돈벌이가 되는 장소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갔다. 고깃배들이 황혼을 안고 피곤해져서 돌아오는 부둣가에서 나는 가장 큰 목소리로 떠들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의 겉으로 나타난 극성스러움, 그 뒤에 얼마나 약한 심장이 가까스로 팔딱거리고 있는지를.…

나에게는 귀엽게 자라나는 어린 딸이 있었다. 아무리 괴로워도 그 아이의 얼굴만 보면 모든 괴로움과 피곤이 사라져버리니 그것 또한 이해 못할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는 아직 어렸지만, 이제 겨우 자신의 뜻을 말로 나타낼 만큼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삶에 일찌감치 지쳐버린 나의 몸뚱이를 받쳐주고 있는 단 하나의 기둥이었다. 나에게 그 아이마저 없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도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든지 아니면 장터거리의 더러운 좀도둑이 되었을 것이다. 운명의 신(神)은 이 몸을 끝내 버리지는 않을 작정이었던가? 피곤과 낙망으로 무거운 몸을 들꽃처럼 가냘픈 어린 딸에게 기대어 나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나를 버리지 않는 대신 아예 짓밟으려는 것 같았다. 나의 어린 딸을 내 품에서 빼앗아다가 저 더러운 악령의 품에다 던져버린 것이다.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나를 보면 천사 같은 얼굴로 웃으며 반기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암이리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나의 팔뚝이며 어깨며 가리지 않고 물어뜯었다. “오오, 하느님!” 나는 울부짖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메마른 울음으로 밤을 지샜다. 어쩌란 말인가? 이 참담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뚫린 길은 아무데도 없고 돌아설 수도 없는 이 최후의 골목에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데도 하늘은 없었다. 땅을 내려다보았지만 땅도 또한 보이지 않았다. 나의 발은 어두운 흑암 속에서 마냥 허둥거릴 뿐이었다. 맹세코 말하거니와 아무데서도 빛 한줄기 나에게 비쳐오지 않았다. 거기에는 바로 죽음의 가슴 한복판이었다. 이제는 악령에 사로잡혀 이리처럼 앙칼지게 울어대는 불쌍한 딸아이의 모습마저 내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내가 아무리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도 당신들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 가라앉은 먼지처럼 나는 끝도 모를 죽음의 심연으로 자꾸만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다. 나의 몸뚱이는 넝마처럼 찢어진 더러운 저주 덩어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분을 만났다. 갈릴래아 태생인 그분은 악령을 한마디 말로 굴복시키는 분이라고 했다. 그에 관한 소문은 딸아이가 악령에게 사로잡히기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분을 위대한 예언자,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놀라운 힘이 있어 못된 악령이 벌벌 떤다고들 했다.… 그분의 이름은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다윗의 아들’이라고도 불렀다. 저 옛날 다윗 대왕의 영화를 다시 누릴 분이라는 뜻이었으리라. 그러나 나에게는 그분이 다윗인지 솔로몬인지,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은 어떻게든 그분을 만나야만 했다. 그분이 은거하고 있는 집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염이 무성한 사나이들 몇이 어울려 묵고 있는 집만 찾으면 되었다. 문간에서 힘센 남자들이 나의 발길을 막았다. “누구를 찾아왔소?” “다윗의 아드님, 하느님의 사람, 위대한 예언자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런 분은 이 집안에 없소.” “소문을 이미 듣고 왔어요. 나는 꼭 그분을 뵈어야만 합니다.” “글쎄, 없다면 없는 줄 알고 어서 돌아가시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그분이 집안에 계시다는 분명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까지 왔다가 어찌 그냥 돌아설 수 있으랴? “다윗의 아들이시여, 불쌍한 여편네올시다. 날 좀 만나주셔요!”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온 동네가 다 들을 수 있도록, 목이 쉬어라고 떠들어댔다.… “다윗의 아들이시여, 날 좀 보셔요. 불쌍한 여편네올시다아~. 죄도 없는 어린 것이 죽어가고 있어요오!” 이상스런 일이었다.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속에서부터 영문모를 힘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따져보면 참으로 오랜만에 질러보는 소리였다. 그동안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나는 숨죽여 살아왔다. 울어도 숨을 죽여 줄었다. 누구의 이름을 마음껏 소리쳐 불러본 적도 없었다. 속에 맺힌 아픔과 한(恨)을 시원하게 토해본 적도 없었다. 아아, 하품을 해도 손으로 입을 막고 이빨로 하품을 깨물어야 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다윗의 아들 예수여! 이 불쌍한 년 좀 살펴주소오~.”… 수염 험상궂은 사내들이 아무리 집안에 아무도 없다고 말해도 내가 이렇게 최후의 힘을 모아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그분은 집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 내가 죽고 마는 것이다.

하늘인들 어찌 나의 부르짖음을 막을 수 있으랴! 내가 쉬지 않고 불러대자 마침내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오? 당신은 누군데 이처럼 시끄럽게 굴고 있는거요?” 그분은 엄숙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설레는 가슴을 두 손으로 진정시키며 그분의 한없이 커 보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붉고 가는 핏줄들이 흰자위를 덮고 있었다. 그것은 잠을 자지 못하여 피곤이 겹친 눈동자였다. “선생님, 불쌍한 년입니다. 제발 저를 그냥 돌려보내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몸을 던져 구분의 발을 움켜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려 그분의 발등을 적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그분이 다시 묻자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 중 누군가가 대답을 했다. “그 여자는 페니키아 과부댁이오. 자기 딸이 귀신한테 사로잡혀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둘레를 살펴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기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그분을 소리쳐 부르는 사이에 몰려온 것 같았다. “선생님, 이 여자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빨리 어떻게 해주셔야겠습니다.” 그분의 동지들 가운데서 주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렇지만 이곳은 이방인의 땅이 아니오? 이 여인의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어서 그냥 돌려보내시오.” 그러자 나의 입술이 나보다 먼저 말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 이 불쌍한 년한테, 이대로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냥은 돌아갈 수 없어요. 제발, 제 딸아이를 살려주셔요.” 북받치는 설움으로 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분의 발목을 움켜잡은 채 나는 벼랑에 매달린 불쌍한 짐승처럼 그렇게 울었다. 다시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지만 나는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온 사람이오. 먼저 이스라엘을 돌보아야 하오. 당신은 이방인이니 어서 그냥 물러가시오. 떼를 쓴다고 모든 일이 다 되는 것은 아니잖소?” 누군가가 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억지로 잡아 일으키려 했다. 나는 사납게 그 팔을 떨쳐버렸다. “안됩니다. 이대로는 그냥 갈 수 없어요. 선생님, 제발 좀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어허, 참 딱한 여자로군! 이것 보시오. 자식들한테 줄 떡을 개한테 주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분이 약간 짜증스런 투로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나의 입술이 제 마음대로 말을 했다. “좋습니다, 선생님. 이 년은 개입니다. 개보다도 천하게 살아왔어요. 그러나 개도 주인집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지 않던가요?” 부스러기라도 좋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냥 이대로 물러가라는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다. 개니, 사람이니, 그런 것을 가릴 짬이 내게는 없었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되는 사람은 아직 무슨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한테는 한치의 짬도 없었다. 이 손을 그냥 놔버리면 그 순간 나는 끝장이었다. 깜깜한 절벽에서 절망의 끝가지에 매달려 본 사람은 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과거에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도 그 경험만 가지고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런 처지에 빠져 있는 사람은 나를 알 것이다. 그리고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개가 된들 어떠랴? 승냥이, 늑대, 아니 바퀴벌레가 된들 어떠랴? 죄 없는 자식이 악령에 사로잡혀 이리처럼 신음하는 것을 멀쩡한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이 사무치는 괴로움을 겪어보지 못한 자는 나의 이야기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변론하지 말라!

나는 계속 말했다. “개가 되어도 좋아요. 그렇습니다. 나는 한 마리 슬픈 개랍니다. 그러나 배가 고파요. 당신의 상머리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한 조각이면 나는 만족합니다. 제발 이대로는 쫓아내지 마셔요.” 그때, 그분의 억센 손이 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나는 그 뜨거운 손을 마주 잡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분을 쳐다보았다. 그분이 말했다. 떨리는 음성으로 그분이 내게 말했다. “여인이여, 장하오! 당신의 믿음이 마침내 하늘을 움직였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아이는 이미 깨끗해져 있으니까….” 처음에는 그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분이 다시 말했다. “어서, 이 길로 당장 돌아가시오. 아이는 깨끗해졌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온몸을 태워버릴 듯한 불길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분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라 하셨지만 어떻게 내 마음이 평안할 수 있겠는가. 숱한 구경꾼들 사이를 헤집고 나는 단숨에 집으로 달려갔다. 보금자리였으나 쉴 수 없는 보금자리였던 나의 집으로 정신 없이 달려갔다.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을 때 캄캄한 방안에서 나의 귀여운 딸이 아아, 백합처럼 깨끗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아이를 꼬옥 껴안았다. 아득하고 먼 여행길에서 이제 막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잃어버렸던 내 삶의 현실을, 꿈결처럼 멀어져 갔던 나의 삶을 마침내 되찾은 것 같았다. 딸아이는 지난날들의 모든 고통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오히려 울고 있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 모든 것을 모르거라. 네 지난날의 상처를 모르는 채 이제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거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이의 마른 뺨을 자꾸만 쓰다듬었다.

무엇을 먹고 살까? 무엇을 입을까? 그렇게도 걱정만 되던 것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갔고,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용기와 자신감이 샘물처럼 솟구쳐 올랐다. 절망의 깜깜한 끝가지에 매달려 온 몸으로 그분의 이름을 불러본 사람은 내 이제 더 무슨 말 아니해도 이 가슴 벅찬 감격을 더불어 나눌 수 있으리라. (마르꼬 7,24~30)

 

이현주 지음, “예수와 만난 사람들”(생활성서사 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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