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예수와 만난 사람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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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3-12-17 ㅣ No.9896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이렇게 사람이 빼곡하니 들어차 있는데 이런 모양으로 어떻게 뚫고 들어가겠어요? 오늘은 그냥 돌아갔다가 내일쯤 다시 와봅시다.” 들것의 앞머리를 들고 서 있던 요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힘껏 흔들며 대꾸했다. “안 돼, 요세! 이대로 돌아가면 안 돼! 어떻게든 나를 그분한테 데려다주게, 부탁이야!” 눈물이 나의 관자놀이를 거쳐 목덜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돌아서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곧잘 지금은 안 되겠으니 다음에 해보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렇게 말해도 되는 일이 따로 있다. 때로는 결코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우리 모두에게 ‘내일’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 어떤 날일 수 때문이다.… 요세처럼 건강한 두 다리가 있어 언제고 마음 내킬 때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으로 미루어도 될 일이었겠지만, 오래된 중풍병으로 몸져누워 스스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나로서는 결코 다음으로 미룰 처지가 못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에 그분을 만나야만 했다. 그를 만나면 이 지루하고도 고통스런 인생이 어떻게든 결판이 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내가 중풍병으로 쓰러지기 며칠 전쯤 되는 날이었다. 동구 밖 우물곁에서 나는 거지를 보았다.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그는 지나가는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에 난 주먹만큼한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렸고, 그것을 파리들이 빨아먹고 있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하필이면 저런 거지 나그네를 이 길에서 만나다니! 그것도 나 혼자서 말이다. 한순간 나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그를 못 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계명이 생각났지만, 그는 나를 찾아온 나그네가 아니었다. 나에게 무슨 요청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길가에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처럼 버려져 있는 걸 내 눈이 우연히 보았을 뿐이다. 안 본 것으로 해두면 그만이다. 피고름이 흐르고 있는 그 저주덩어리를 만졌다가 내 몸이 불결해진다면 누가 나를 위하여 다시 정결 예식을 올려주겠는가? 그 거지는 오래 전부터 버림받은 몸이었다. 내가 그를 못 본 척하고 지나쳐가기 전에도 숱한 시선들이 그를 외면했을 것이었다. 이제 와서 내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버림받은 자로 그냥 두어라! 모든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닌가? 내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좀 해준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상은 여전히 더러울 것이고 사람들 사는 곳에는 여전히 저주받은 나그네 거지들이 우글거릴 것이다. 마침내 나는 그를 등지고 서둘러 우물곁을 떠났다. 그러나 내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그리고 그것이 죄 값으로 하늘이 내려준 천형의 질병임을 깨달았을 때, 문득 그 거지가 되살아나 나의 가슴을 더러운 손으로 둥둥둥 북처럼 지는 것이었다. “자네는 혼자서 깨끗하려고 했지? 그래서 나를 못 본 척했지? 보게, 그 결과가 어떤가를.” 그가 이렇게 빈정거리며 속삭일 때 나는 악몽을 떨치듯 소리쳤다. “비켜라, 이 더러운 자야!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나를 괴롭히는거냐?” “자네는 나를 외면했어. 내 더러운 몸에 손을 대지 않았네. 바로 그 때문에 내 몸의 불결함이 자네 몸에 옮은거야.” “왜 하필이면 나한테인가?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 더러운 저주덩어리가 옮았느냔 말이다! 너를 버린 것이 나였더냐? 나만이 너를 외면했더냐?”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렸다 해도 그것이 자네와 나의 관계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건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지. 세상이 다 나를 버렸다 해서 자네가 나를 버려도 된다는 그런 법은 없다네.”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갈 때마다 결국 그것은 나와 어느 이름모를 거지와의 환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과 자신의 대화임을 발견하곤 했다. 그것이 더욱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그 거지 나그네를 돌봐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온 세상이 다 그를 버렸다고 해서 내가 그를 외면해도 좋다는, 그런 논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저주받은 거지의 불결함을 피하려 했고, 바로 그 까닭에 그는 나의 몸에다 자신의 저주덩어리를 옮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나는 어떻게든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수없이 나는 용서를 빌었다. 그를 버림으로써 버림받은 것은 결국 나였다.

그러던 차에 나는 그분의 소문을 들었다.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인 그는 어부생활을 하던 몇몇 동지들과 함께 이 마을 저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를 설교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주인될 자격을 갖추고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기만 하면 어쨌든 지금의 이 저주스런 삶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문대로라면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열쇠 같은 사람이었다. 땅의 모든 맺힌 것을 풀 수 있는 황금열쇠! 나는 그가 우리 마을 쪽으로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그의 소문이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올 때 나는 더욱 애타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마침내 그가 우리 마을에 나타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달려갈 때 나는 이웃에 살고 있는 요세를 불렀다. 그는 마음이 착하여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는 젊은이였다. “요세, 나를 그분께 데려다주게. 내 마지막 소원일세.” 간절하게 부탁했다. 요세는 말없이 나가더니 다른 친구 셋을 데리고 왔다. 이렇게 해서 나는 들것에 누워 그분이 있다는 집 문 앞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도저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문간에는 턱수염이 무성한 사내들 서넛이 서서 밀어닥치는 군중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눈에 그들이 그분의 동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요세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어떻게 들어갈 수 없겠느냐고 말을 건넸다. 사내는 안 된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살펴봐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성한 두 다리를 가진 사람도 안 될 터인데 나처럼 들것에 누워 있는 몸으로 군중들의 장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개중에는 왔다가 돌아서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몇 번 기웃거리다가 그들은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돌아설 수 있는 사람들은 돌아서서 가도 되겠지만 나는 여기서 돌아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다시 기약 없는 병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차라리 그것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요세에게 말했다. “나를 여기 내버려두고 자네들 갈 곳으로 가보게. 여기서 그분을 기다리겠네.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네. 고맙소, 젊은이들. 명부(冥府)에 가서라도 기억하고 있겠소. 자, 어서들 가보시오.” 그러나 요세는 차마 나를 거기 길가에 버려두고 돌아설 수는 없다는 눈치였다. 언젠가 우물곁에서 낯선 거지 나그네를 버려두고 등졌던 나처럼, 그렇게 돌아설 수는 차마 없다는 눈치였다. 마음씨 착한 요세! 그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다른 데로 들어가세!” “어디로 들어가잔 말인가?” “지붕을 뚫고 아래로 내려보내자.” “그렇지! 그것 참 그럴 듯한 생각이군. 자 들게!” 그들은 들것을 들고는 지붕으로 올라갔다.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아무도 우리를 말리러 오지는 않았다. 나무를 몇 개 걸치고 풀잎을 엮어 얹어 햇빛을 가리게 되어 있는 지붕을 뜯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뜯어낸 지붕 바로 아래가 그분이 앉아 있는 방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붕을 뜯어내는 뜻밖의 행위에 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우리에게 쏠린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집주인인 듯 싶은 사내가 달려오더니, “게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요?” 하고 소리쳤다. “우리가 변상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요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이 사람을 좀 받아주시오. 선생님을 꼭 좀 만나야겠답니다! 이렇게 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어요.” 들것에 실린 내 몸뚱이가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엉겁결에 들것을 받아내렸다. 여기저기서 혀를 차며 비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저건 중풍병자 아무개 아닌가?” 나를 알고 있는 듯한 누군가가 내 아름을 부르며 곁의 사람에게 수근거렸다. “불쌍한 친구이긴 해. 그렇지만 이게 무슨 소동인가? 남의 집 지붕을 다 뚫고!” 내가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사방에서 따가운 눈총이 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내 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 순간 꿈결에서인 듯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불쌍한 형제여, 당신은 이미 죄를 용서받았소!” 그분이 어느새 나에게로 다가와 있었다. 키가 컸고, 검은 눈동자에서는 알 수 없는 광채가 빛났다. 나는 그의 텁수룩한 구레나룻을 쳐다보다가 순간 기절할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수척한 얼굴이, 불거져 나온 광대뼈와 모난 양쪽 턱이, 그 어느 날 우물곁에서 내가 버렸던 바로 그 거지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눈 한 번 감았다 뜰 만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거지가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잡는 것을 느꼈다. 또 그의 말도 똑똑하게 들렸다. “오랫동안 고생했소. 형제여! 난 벌써 오래 전에 당신을 용서했소. 이제는 안심하시오. 그러나 두 번 다시 나를 모른 척하여 나를 슬프게 하지는 마시오.”

내가 그런 환상에 빠져 있는 동안 방안의 현실은 오히려 더욱 삭막하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침 거기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의 말을 듣고는 “저 친구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군. 도대체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수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의 굵은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쓸데없는 일로 수근거리지들 마시오. 당신들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척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이 땅에서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늘에서 하느님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이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당신네들은 두 가지 굳어진 생각의 무덤에 묻혀 있소. 첫째는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생각이고, 둘째는 이 중풍병자가 분명한 죄인인 것처럼 당신들 자신은 분명한 의인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오. 당신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오. 당신들을 묶고 있는 굳은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시오, 부디! 내가 온 것은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보는 자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함이오.” 그의 말은 마치 폭포수와 같아, 여기서 내가 옮긴 것은 그 대충의 뜻을 요약한 것일 뿐이다. 방안에 있던 그 누구도 쏟아지는 그의 말을 막거나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나에게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소.” 그는 나에게 다가서며 명령했다. “형제여, 내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하시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인자로운 눈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외면했던 일에 대해서 나는 이미 용서한지 오래라고 했소. 기억하시오?” 대답 대신 나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 죄는 이제 용서받은거요. 그러니 여기 이렇게 누워 있을 아무 까닭이 없소. 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일어나서 요를 걷어들고 집으로 가시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몸을 옥죄고 있던 음흉한 힘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마침내 떠나는 듯했다. 도무지 움직일 줄 모르던 나의 왼쪽 반신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마음대로 움직여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삼 년 동안 누워 있던 요를 걷어들고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그 제일가는 일은 용서하는 일인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버린 자는 버림받은 자를 용서할 수 없다. 살인자는 죽임을 당한 자를 용서할 수 없다. 자칭 의인은 죄인을 용서할 수 없다. 버린 자는 다만 버림받은 자의 용서를 받아야 할 따름이고, 살인자 또한 죽임을 당한 자의 용서를 받아야 할 따름인즉, 어느 날 나의 곁으로 오시어 나를 용서해준 그 사람은 모든 버린 자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버림을 받았고, 모든 살인자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했고, 모든 의인을 용서하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었던가?

인생 수명의 길고 짧음이 참으로 문제가 아니 됨을 비로소 알겠구나.

 

이현주 지음, “예수와 만난 사람들”(생활성서사 출판) 중에서

첨부파일: Jesus-4.hwp(1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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