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예수와 만난 사람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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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3-12-20 ㅣ No.9902

 

새벽 닭 울음소리 들으며

 

 

도대체 두려움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폭풍과 비바람 속에서 잔뼈가 굵은 나의 건강한 육신을 바람에 불려가는 낙엽처럼 흔들리게 만든 저 사나운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반석이라는 뜻을 지닌 베드로, 그분이 지어주신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아니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엄습하는 두려움의 물결에 휩싸여 나는 한 알의 작은 모래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아아, 나는 그 참담한 순간 스스로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신 없이 그분을 모른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그렇다. 나의 입술과 혀는 나의 의지와 전혀 아무런 의논도 없이 고장난 기계처럼 “나는 정녕 저 사내를 모른다.” 되풀이하여 떠들어대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공포 속에 포로가 되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나의 고백을 알아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동지를 배반한 사내의 비겁함을 상쇄시킬 수야 있겠는가? 내가 세 번째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면서 거짓말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썰물처럼 나에게서 물러갔다. 혼자 남은 나는 새롭게 다가오는 두려움과 고독의 물결에 파묻혀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말을 잘 듣고 기억해두시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당신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오.” 먼 옛날에 들었던, 그래서 기억에 어슴푸레한 말이 아니었다, 바로 간밤의 일이었다. 정신을 되찾게 되면서 지난 몇 시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분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할 때의 이상한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회상되었다. 포도주를 따르고 마시던 동지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어둠과 차츰 사위어 가는 모닥불과 서성거리는 낯선 사람들의 어렴풋한 그림자들뿐이었다.…

나는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관저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였다. 어머니의 품처럼 어둠이 나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마침내 걷잡을 수 없는 설움으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노릇이란 말인가? 나는 그분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사람이라면 그것도 대장부 사나이라면, 흘러가는 구름을 향해서인들 어찌 알면서도 모른다고 할 것인가! 돌아다니는 마을의 개를 향해서인들 어찌 배신을 할 것인가! 그런데 나는 내 목숨 잃는 한이 있어도 버리지 않겠노라 큰소리로 장담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나의 스승이자 동지인 그분을 배신했던 것이다. 죽음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죽음말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죽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또한 여전히 죽어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눈물샘이 모두 말라버릴 만큼 운다 한들, 이 밤이 새어 밝은 날이 돌아오고 다시 그 날이 저물어 밤이 되기를 거듭하는 동안 끊임없이 운다 한들 어찌 눈물로 이 죽음의 차디찬 껍질을 녹일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나는 울었다. 울음말고는 아무 다른 할 일이 없었다. 흐느끼고 있는 나에게 다시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만 울어요, 베드로 동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무슨 짓이오? 그래. 내가 뭐라 했소? 내 말대로 되지 않았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 우리는 모두 풀잎처럼 약한 인간들인 것은. 나는 나대로 아버지의 손에 잡혀 이 길을 갑니다만 울지 말고 일어서시오. 당신은 아직 갈 길이 멀었소.” 쏟아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 그렇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은 미처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나의 나약함에 대하여 환하게 꿰뚫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분과 만나던 첫날부터 그랬다.

밤새도록 우리는 그물을 던졌지만 허탕이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우리였다. 갈릴래아 호수는 손금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다. 철에 따라 또는 시간에 따라 고기떼가 어디에 몰려 있는지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 우리였다. 그러나 그 날 밤은 우리의 모든 기술과 경험에서 얻은 지식과 애씀이 쓸모 없었다. 그물에는 작은 고기 한 마리 걸려들지 않았다. 가끔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긴 했다. 세상살이가 우리네 계산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이 밝아올 무렵 우리는 밤새도록 헛수고한 일로 인하여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마지막이니 한 번만 더 던져보자는 마음으로 그물 던지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펄펄 뛰는 고기 대신 물거품 같은 낙담과 실망을 건졌을 뿐이었다. 마침내 그물질을 포기하고 텅 빈 배를 저어 해변에 이르렀을 때 그분이 거기서 있었다, 그가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고기를 좀 잡았소?” 우리는 대답할 기분조차 들지 않아 묵묵히 배를 저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고기떼가 지금 저 깊은 곳에 물려 있어요. 거기다 그물을 던져보시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물 가득 담겨있는 고기떼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쉽게 그의 말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어서 내 말대로 하시오. 깊은 곳에 그물을 쳐요.” 그의 말속에는 누구도 거역 못할 무슨 힘이 있는 듯했다. 그것이 바로 그분만이 지니고 있는 확신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확신이었다. 그가 그렇다고 믿으면 무엇이든지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그에게 대꾸했다.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허탕이었소.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어디 한번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보지요.” 소용없는 일이라고 투덜거리는 친구들을 설득하여 나는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의 말대로 되었던 것이다! 그물이 찢어질 듯 잡힌 고기떼를 끌고 해변으로 나오며 나는 아직 거기에 서 있는 그룰 바라보았다. 그는 영문모를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존재가 두려웠다. 그와의 만남이 나를 알 수 없는 모험의 어둠 속으로 끌어들일 것 같았다. 잡힌 고기떼를 끌어올리며 기뻐하는 친구들을 버려둔 채 나는 그분에게 다가갔다. 고기떼 같은 것은 이제 내 앞에 펼쳐지기 시작하려는 새로운 운명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다. “선생님, 나는 무식한 어부일 뿐입니다. 당신 같은 분을 감당할 수 없어요. 나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나는 그분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시몬,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어요. 나를 따라오시오. 나와 함께 갑시다!” 그것은 차라리 명령이었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때가 바뀌고 있소! 물고기나 낚으며 세월을 보낼 때가 아니오. 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 나와 함께 갑시다. 가서 이제부터는 고기 대신 사람을 낚읍시다.” 나는 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를 따라나선 뒤, 나는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분에게 “나는 덩치만 컸지 사실 어린아이입니다. 배운 것도 없고 재산도 없어요. 배질하는 것말고는 기술도 없답니다. 왜 하필이면 못난 나를 동지로 삼으셨지요? 세상에는 훌륭한 사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많은데….”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모르겠소? 날 보시오. 나한테도 재산이 없고 그럴듯한 학식도 없어요. 있는 자들, 강한 자들의 시대는 바야흐로 저물고 있소. 보시오. 이제는 없는 자들, 약한 자들의 손으로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오. 그 모습이 내 눈에 저토록 확실하다오.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해요.” 그가 속 깊은 곳에 감추고 있는 무서운 확신의 뿌리는 밑바닥 인생에 대한 요지부동의 믿음이기도 했다. 아니. 그것뿐이었다. 짓눌리고 빼앗기고 얻어맞고 밟히고 으깨어지고 내어쫓긴 사람들이 있는 곳에 그분은 있었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는 묻지 않았다. 그가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는지도, 어디에서 출생했는지도 그분은 묻지를 않았다. 다만 그분은 지금 그 사람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살폈다. 남을 누르고 있는가 아니면 눌림을 받고 있는가, 빼앗고 있는가 아니면 빼앗기고 있는가, 버리고 있는가 아니면 버림받고 있는가, 멸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멸시받고 있는가, 그가 만일 남을 경멸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경멸당하고 있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다. “부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용한 양식’을 소유한 사람은 부자가 아니다. 그러나 일용하고도 남을 재물을 소유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부자다. 누군가가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이다. 붉은 비단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부자는 알고 보면 그의 문간에 버려져 있는 거지 라자로의 일용할 양식을 빼앗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됩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 세상 그 누가 맘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며 천국엔들 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때, 우리는 그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렇소. 우리의 힘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오. 그러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만 할 어떤 일이 따로 있을까요?” “있지요. 당신들의 내장을 비워 하느님의 영을 모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말씀의 뜻을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했다. 그분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나 한편 유쾌한 일이기도 했다. 세상이 뒤집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 곤두박질하여 낮은 자리로 내려오고 바닥에 깔려 있던 자들이 제 자리에 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바다를 명하여 산이 되게 할 수도 있다.”라고 그분은 늘 말씀하셨다. 우리는 열심히 그분을 따라다녔지만 끝내 그 ‘겨자씨 만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사실이었다. 믿음을 지니기는커녕 그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조차 못했다. 그런대로 세월은 흘러갔고 그를 좋아하며 따르는 무리가 늘어가는 만큼 오히려 그를 미워하며 죽이려는 자들의 수도 늘어만 갔다. 이 땅의 첫아들 카인이 제 아우 아벨을 죽인 이래 싸움이 없는 날이 없었겠지만 어찌하여 한 하늘 아래에서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며 죽이고 마는 저주스런 비극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어째서 서로 사랑해야 할 육신으로 오히려 증오하며, 서로 쓰다듬어주어야 할 손으로 칼과 창을 휘두르는 것일까? 평생토록 평화와 아름다움을 생각해도 다 못 할 두뇌로 전쟁무기를 개발하여 살인수단을 연구하는 것일까? 이 지긋지긋한 싸움질을 중단시킬 그 어떤 길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분을 증오하여 죽이려는 자들의 수효가 늘어가는 것을 보며 두렵기도 했지만 바야흐로 이 땅에서 모든 증오와 살생을 추방시킬 최후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놀라운 확신으로써 우리 앞에 샛길을 내며 세상을 헤쳐나가는 그분에게서 메시아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제 머지않아 그분의 맨발 앞에 세상은 창과 칼을 꺾고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허무한 일이었던가! 그분은 깊은 밤, 아직 새벽 미명에 칼과 몽치를 들고 온 군인들에게 저항 한 번 못 한 체 체포되었고 겁에 질린 동지들은 어둠에 몸을 숨겨 뿔뿔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 또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스승이자 동지인 그분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한 번 울기 시작한 닭의 울음소리는 잦아지면서 동녘 하늘로 날아가 새벽의 날개를 몰고 왔다. 날이 뿌옇게 샐 때까지 나는 울고 또 울었다. 그분이 나의 나약함을 알고, 그리하여 당신을 배신할 것까지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부끄럽고 고마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날빛이 어김없이 내가 웅크리고 있는 후미진 골목을 내려와 발아래 작은 돌맹이들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비단옷을 입은 의회원들이 대사제의 관저로 서둘러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제 저 높은 담장 안에서는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 참인가? 갑자기 그것이야말로 진정 이 땅에서 모든 증오와 다툼과 비극을 소멸시킬 최후의 결전이라는 생각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렇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그분 홀로 온 세상을 마주하여 이제 막 결전에 들어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이었다.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시여. 그러나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여기 당신을 배신하였으나, 배신하였으므로 당신을 끝내 떠날 수 없는 못난 베드로가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다시 우렁차게 들려왔다. 어둠이 끝나고 새날이 밝아 왔음을 확인하는 나팔소리처럼, 내 가슴을 새삼 설레이게 하는 그 닭울음소리가 들으며 나는 그곳을 떠났다. 그분의 말씀대로 나에게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마태 26, 69-75)

 

이현주 지음, “예수와 만난 사람들”(생활성서사 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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