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예수와 만난 사람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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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3-12-21 ㅣ No.9905

 

당신, 낫기를 바라시오?

 

 

처음부터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공평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태어나면서부터 지배계층에 속하여 하인과 노예를 부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평생토록 남의 종살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어떤 자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별반 일도 하지 않으면서 호의호식을 하고, 어떤 자는 떠돌이 삯꾼의 집안에 태어나 죽기까지 일손을 놓지 못하고 무거운 명예를 져야만 하는가? 어려서부터 나는 이와 같은 불공평에 관하여 그 까닭을 알 수 없었고, 그 결과는 곧장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불평으로 폭발되곤 했다.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에드기아의 아들 유다스가 이끄는 민중봉기군에 가담하여 로마놈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하게된 것도 실은 그러한 불평과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세상의 불공평을 없앨 수는 처음부터 없었다. 봉기군은 한때 갈릴래아의 한 성을 점령하는 등 세력을 떨쳤지만 우수한 무기와 조직력을 구사하는 로마군에게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2천 명이나 되는 우리 동족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갔다. 나는 지금도 그 참상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이 휩쓸고 간 마을은 잿더미와 처절한 아우성만이 남았다. 울부짖는 이들은 남편을 잃은 과부와 아비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무서운 홍수가 휩쓸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밭에서 고물거리고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들처럼, 그들은 학살당한 자들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아니한 언덕과 골짜기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이를 갈았다. 내 몸 속에 피가 아직 남아 있는 한 로마놈들을 증오하고 그들을 하나라도 죽여 없애는 일을 쉬지 아니하리라! 살펴보니 나처럼 이를 가는 유대인이 또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무리를 이루었다. 품에는 날 선 단도를 품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일컬어 ‘자객단’이라 하였다. 이름 그대로 우리는 골목이나 들판이나 강변이나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로마인이라면 조건 없이 그 몸에 칼을 꽂았다. 증오는 증오를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른다. 어느 날, 나는 로마인의 마차 한 대를 다른 두 동지와 함께 습격하였다. 놀란 말이 허둥지둥 어쩔 줄 몰라하는 동안 우리는 날쌔게 마차에 탄 자들을 끌어내렸다. 그들은 놀랍게도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었다. 남자는 말을 모는 사람 하나뿐이었고 그는 이미 처치된 뒤였다. 그런 차림으로 로마인이 나들이를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니, 드문 일이라기보다는 없던 일이었다. 그 여인을 칼로 찔러야 할 것인지 아닌지, 나는 잡시 망설였다. 그때 한 동지가 소리쳤다. “무얼 하고 있는가? 어서 처치하고 몸을 피해야지!” 나는 겁에 질려 말도 못하고 어린아이를 부둥켜안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단장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내가 칼을 들어 여인의 가슴을 겨냥하고 다가서는 순간, 갑자기 미친 듯한 소리를 지르며 말이 뛰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 바람에 마차 모서리가 나의 칼을 든 손과 허리에 세차게 부딪쳤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동굴 속에 누워 있었다. 함께 마차를 습격했던 두 동지가 곁에 있었다. 허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날부터 나는 허리를 쓰지 못하는 병신이 되어 이렇게 오늘날까지 죽지 못해 사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맹세한 동지들도 재기불능인 나를 떠나고 말았다. 나는 거리에 던져진 존재가 되어 뭇사람의 자선행위의 대상 노릇을 하며 살아왔다. 부유한 자들은 나에게 한 푼 두 푼 던져줌으로써 자선을 베풀었다는 만족감을 즐길 수 있었고, 나는 그들이 던져준 돈으로 연명을 할 수 있었다. 지난 38년! 나는 실로 그들이 던져주는 돈 몇 푼에 목숨줄을 걸고 살아왔다.… 누군가가 나를 들어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베짜타 못가에 옮겨놓았을 때, 그 신비한 못에 대한 소문이 잠깐 동안 내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것 같았지만 역시 소용없는 일이었다. 못가에 행각 다섯 채가 서 있는 데 행각마다 소경, 절름발이, 중풍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모두 베짜타 못물이 소용돌이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하늘의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는데 그 순간 제일 먼저 들어가는 환자의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었다. 거기에도 ‘선착순’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어, 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불공평이 여전했다. 내가 그 곳에 누워 있는 동안 한차례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밤중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물이 움직인다!” 그러자 행각 다섯 채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첨벙첨벙 물 속으로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나로서는 검을 밤하늘에 떠 있는 영롱한 별들을 바라볼 뿐이었고, 별들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비웃는 웃음의 늪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였다. 그 날 밤 소동 끝에 누가 병이 나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가 병이 나아 그 날 밤으로 행각을 떠났다는 소문이 있었고, 사람들은 소문으로 만족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무렵, 거기서 그를 만났다. 그는 어느 순간, 바람과도 같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눈이 이글거리는 숯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장대한 사내였다. 역시 몸집이 큼지막한 사나이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좌우를 살펴보는 일도 없이 곧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38년 동안 멎었던 나의 심장이 새삼스럽게 고동치는 것 같았다. “당신, 참으로 오래 누워 있었군요?”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38년이오!” “흠! 오랜 세월이요.” 나는 속으로 ‘그래서 어쨌단 말이오?’ 하고 물었으나 입 밖으로 말을 내지는 않았다. “당신, 낫기를 바라시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어리둥절하여 그를 바라보자 다시 재우쳐 물어왔다. “당신, 낫기를 바라느냔 말이오.” 순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는지 몰라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과연 낫기를 바라고 있었던가?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고, 나 또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38년이란 오랜 세월은 나에게서 낫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까지 앗아가 버리지 않았던가? 그의 질문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끝내 피할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어떻게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낫기를 바라고 있는가? 이 38년 동안의 저주스런 병상에서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가? 그가 맑고 뜨거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식힐 수 없는 연민의 숯불 같았다. 나는 그의 눈꼬리에 남모르게 괴어 있는 맑은 눈물을 보았다. 그 눈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대답하게, 이 사람아. 낫기를 바란다고! 사무치게 바라고 있다고! 이 저주스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걷게 되기를 바라고 있노라고! 어서 대답하게, 이 답답한 사람아!” 나는 이윽고 자신 없는 목소리를 대꾸였다. “물론 낫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다 소용이 없소. 나는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아무도 내 몸을 들어 저 못물에 넣어주지 않으니까요. 이런 마당에 내가 낫기를 바란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러자 그가 갑자기 온 베짜타 못가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낫기를 바란다면, 그걸로 충분한거요! 다시 묻겠소. 똑바로 대답하시오. 당신, 낫기를 바라시오?” 나도 엉겁결에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 소리는 나의 마비된 발뒤꿈치로부터 오장육부를 통하여 내 입 밖으로 무슨 뜨거운 바람처럼 온몸을 통과하여 터져 나왔다. “그렇소! 나는 낫고 싶소!” “그럼 됐어요. 자, 이제 그 더러운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시오!” 나는 마치 오랜 악몽으로부터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내 속에 갇혀있던 나를 벌떡 일어서게 하였다. 아아, 그 더러운 요를 걷어들고 나는 걸었다! 분명히 그곳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아니면 꿈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것이 꿈이라면 언제까지나 깨어나지 말기를 바랄 따름이다. 나는 여전히 환자들로 가득 차 있는 베짜타 못가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뭐라고 물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꿈조차 꿔보지 못한 일이, 나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바로 내 몸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나는 낫고 싶다!” 이 한마디가 나를 묶고 있는 모든 마술의 힘을 한순간에 끊어버렸다. 가위 눌려 있던 나의 의식과 육신을 해방시켰다. 나를 자유롭게 할 힘은, 나의 고질병을 낫게 해줄 능력은, 베짜타 못물에도 없었고 거기에 내 몸을 던져 넣어 줄 건강한 이웃에게도 없었다. 아무도 38년이나 된 나의 마비를 풀어 줄 수 없었다. 그 힘은 바깥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당신이 낫기를 바란다면, 그걸로 충분한거요!” 다른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다는 나의 체념과 절망이 보이지 않는 내 몸의 사슬이었다. 그런데 그가 잠들어 있던 나의 의식을 깨웠던 것이다. 나는 38년이나 저주의 보증서처럼 깔고 있던 요를 걷어들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삶이란 과연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나의 앞길을 막아섰다. 테필린을 이마와 왼팔에 매달고 긴 옷을 걸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엄숙하게 말했다. “너는 오늘이 안식일인 것도 모르는가? 요를 걷어들고 돌아다니다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38년이나 누워 있다가 일어선 나에게 ‘안식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쉬는 날이라면 지긋지긋하게 쉬었다. 이 벅찬 해방의 날에 어찌 가만있으란 말인가? 내가 어리둥절하여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자 그들 중 다른 하나가 말했다. “안식일에는 지켜야 할 법이 있어. 네가 요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이다.” 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38년만의 벅찬 해방 앞에 들이민 것은 축하의 말도 격려의 박수도 아닌 무슨 개똥같은 놈의 법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모르오! 날 보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신 분이 시킨 대로 하는 것일 뿐이오! 법 같은 것, 나는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항의조로 맞서자 그들이 물었다. “누가 너에게 요를 들고 걸어가라고 시켰느냐?” 나는 둘레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가? 죽음보다 더 고약한 지옥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신 은인을 찾아보지도 아니하고 제 기쁨에 겨워 뛰어다니기만 하다니!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몰려들어 붐볐지만 그분과 그분의 동료들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몰라요, 그분을 찾을 수가 없소. 나는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때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을 고쳐주신 분은 나자렛에서 올라오신 예수요. 그는 지금 성전에 있어요,. 그리 가보시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성전을 향하였다. 그분은 종려나무 그늘에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나를 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제여! 깨끗하게 되었군! 하느님께 감사 드리시오.” 나는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부드러운 손으로 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38년이란 오랜 세월이요. 그러나 세월이란 지난 뒤에 보면 언제나 잠깐이지. 그 동안에 쌓여 있던 모든 증오와 분노를 풀어버려요. 당신 몸 속에 그것들이 찌꺼기를 남아 있는 한 전보다 더 무서운 병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때 둘러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감탄조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그러자 그가 대꾸하였다. “나를 다윗의 이들이라 부르지 마시오. 나는 사람의 아들이오. 사람이 아들은 다윗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소.” 그의 음성은 우렁차고 막히는 구석이 없었다. 아무도 그 음성에 재갈을 물릴 수는 없는 듯하였다. 그가 다시 나에게 말하였다. “이제 안심하고 가시오.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말고, 이제부터 시작되는 당신의 새로운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내시오. 아버지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을 기억하고 계셨소. 당신도 그분을 기억하도록 힘쓰시오. 샬롬!”…

그 뒤로, 나는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얼마 안 있어 시골 고향 부근에 와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슬픈 소문이 들려왔다. 나자렛 예수,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 로마의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슬픔에 겨워 울었다. 그러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가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여 갈릴래아 지방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지금 갈릴래아로 떠날 참이다. 가서 그를 만나야겠다. “당신이 낫기를 바란다면, 그걸로 충분하오!” 그렇다! 그분의 말대로였다. 문제는 나에게 38년이나 일어서겠노라는 간절한 소망, 그것 없이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뜨거운 온몸의 소망,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한 애끓는 소망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주어진 비극과 절망의 상황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기껏 한다는 게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할 뿐인 나 자신이 문제였다. 그는 나의 가위눌린 상태를 날카로운 말씀의 칼로 찢고 누워 있던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서게 하셨다. 그를 만난 수간 3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덧입혀졌던 모든 허위의 껍질이 벗겨졌고 나는 일어섰다. 나는 믿는다. 그는 있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억누르고 속박하고 가두고 분열시키는 온갖 허위의 사슬을 풀어주는 해방자다. 그가 갈릴래아 가난한 마을에 있다니, 내 비록 지금 쇠약한 몸이긴 하지만 찾아가 만나보리라.

 

이현주 지음, “예수와 만난 사람들”(생활성서사 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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