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설해목(雪害木) (무소유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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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ㅣ No.12392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 주었다.
이때 더먹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을 들어주는 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고 안 계신 한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노사의 모습이다.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인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밧티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 앙굴리말라를 귀의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 법정스님, 1968 - (무소유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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