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성당 게시판

부끄러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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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경 [baebae] 쪽지 캡슐

1999-03-23 ㅣ No.130

부끄러운 사랑 이정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 듯 싶은데 난 그때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고 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나에게는 머언 나라의 종소리처럼 느껴집니다. 한때는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야기할 수 없는 당신들이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때 분식집 구석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런 여자였지요. 공무원도 해보고 사무실에도 있어보았지만 그 돈으로는 동생들 학비조차 되지 않더라고 밤마다 흠뻑 술에 젖는 그런 여자였지요. 그녀를 만나고서부터 내겐 막니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막니가 생겨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그녀에게서 느꼈을 때 그녀는 이미 먼 길 떠난 뒤였지요. 사랑이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부끄럽습니다. 숲속 길을 둘이 걷고 조용한 찻집 한 귀퉁이에 마주 앉아 귀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믿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주어도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아직 난 잘 모르고 있으므로 내게 아픈 막니를 두고 떠나간 그 여자처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댈 수 있게 한쪽 어깨를 비워둘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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