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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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09-19 ㅣ No.2009

 

27. 권희 바르바라, 부인(權喜, 1794-1839), 참수

 

권희 바르바라는 원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결혼 후에 남편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수계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바르바라는 순교자 이광헌 아우구스띠노의 아내이며 순교자 이광렬 요한의 형수이고, 순교자 이아가타의 어머니이다. 한 마디로 권희 가족은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일가"이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서 앵베르 주교 및 신부들을 자기 집에 모셔와서 신자들을 모아 미사에 참여케 하고 강론을 듣게 하며 성사를 받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1839년 4월 7일, 그녀는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8세된 아들과 17세된 딸과 함게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배교를 강요하는 수 많은 형벌을 받았으나, 가장 괴로웠던 고문은 어린 자녀들이 한없는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형조에서는 어린이들을 형조에서 신문하는 것이 법률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구실로 바르바라의 자녀를 전에 있던 옥으로 돌려 보내니, 이 어린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부모들과 헤어져 있지 않게 하여 달라고 울부짖었던 것이다. 형리들은 이 어리이들을 이용하여 바르바라의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바르바라는 뼈를 깎는 아픔을 앓으면서도 끝까지 항구했던 것이다. 다행히 포청에서 80세 된 시어머니와 8세의 아들을 풀어주었으나, 그의 딸 이아가타가 끝까지 남아 태장 300대 이상과 대곤 90대를 맞았고, 주림과 목마름과 추위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통의 나날을 4개월 넘게 지내다가, 마침내 다른 신자 5명과 함께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6세였다.

 

 

28. 이정희 바르바라, 과부 (李貞喜, 1799-1839), 참수

 

이정희 바르바라는 시흥군 봉천의 어느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순교자 허막달레나의 딸이요, 순교자 이막달레나의 언니로서 오직 성교회의 교리에만 따라 열심한 수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완강한 외교인이자 천주교를 몹시 싫어하는 아버지 때문에 신앙생활에 많은 고통이 있었음은 물론 기도와 수계생활을 몰래 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집안의 귀찮은 일을 수없이 당해야 했지만 그녀는 뛰어난 신앙과 강력한 의지력을 가지고 열심한 생활을 하였다. 이바르바라가 결혼 할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어떤 외교인 청년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결혼을 거짓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3년 동안을 앉은뱅이 노릇을 하였다. 3년이 지나자 약혼자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녀를 단념하였다. 사실 그녀의 이러한 인내와 고통은 뛰어난 신앙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르바라의 이러한 실제 행동을 알고 있던 어떤 교우 청년이 청혼을 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리하여 바르바라는 외교인 아버지 밑에서 동정을 지킬 수 없다면 신자와 결혼하는게 낫다는 그녀의 소원대로 신자와 혼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2년 뒤 남편을 여의고 친정에 돌아와 있다가, 그 후 서울에 있는 고모 이데레사의 집으로 가 있었는데, 이때 동생인 이막달레나도 동정을 지키며 살기 위해 서울로 와 함께 살며 주님께 대하여 충성을 지키고 박해를 만나는 경우에는 항구하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바르바라는 동생 막달레나와 고모 데레사와 함께 스스로 포도청에 나가서 신앙을 고백하고 온갖 형벌을 받은 다음,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29. 이연희 마리아, 부인(李蓮喜, 1803-1839), 참수

 

이연희 마리아는 1839년 5월 24일에 순교한 남명혁의 아내로서 성격이 강직하고 매우 영리하며 부지런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리에도 밝아서 많은 여교우들을 가르쳐 성사를 타당히 받도록 주선했던 분이다. 남편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을 자기 집에 모시고 첨례를 보았으며, 성직자와 신자들이 모여 오면 이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등 갖은 열성을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모범이 많은 교우들의 마음을 끌었고, 남편의 회장직을 잘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기해년 4월 7일, 그녀는 남편과 12세 된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는데, 이것은 아내가 체포된 데 대한 앙심을 품은 어느 예비자의 밀고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리아는 옥에 갇혀 있을 때 포졸들의 무례한 언동을 준절히 꾸짖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 남다미아노로부터 "교우는 천주를 위하여 순량한 양같이 죽어야 하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지 마오"하는 주의를 듣고부터는 모욕과 학대를 원망하지 않고 참아 받았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모정의 순교였다. 당시 12세의 아들이 다른 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형리들이 그 아들을 매질한 뒤 잔인하게도 싱글벙글 웃으며 아미라를 찾아와 아들을 매질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가혹한 형벌을 이기지 못하여 혹시 배교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하면서도, "이것은 주의 가장 크신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아니 하였다고 한다. 어떤 증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 천주를 진실히 사랑하였고, 그 영혼의 원은 오직 천국을 향하여 있었다" 한다. 그녀는 12살 된 아들을 남겨 놓고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36세의 나이로 참수치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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