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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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09-29 ㅣ No.2062

 

순교자의 성월을 맞아 순교성인의 씨리즈를 연재했는데,

이제 며칠 안남았습니다.  아직 다 소개하지 못한 성인이 많은데....

하지만 기왕 시작한거 계속 할렵니다.

많은 관심부탁드려요...

 

 

56. 정화경 안드레아, 회장(鄭화경, 1807-1840), 교수

 

 

정화경 안드레아는 충청도 정산 고을에 사는 부유한 신자 입안에서 태어났지만, 본성이 순박하고 양순한 반면에 머리가 둔하고 지나치게 고지식하였다. 그리하여 친구들이 천주교 봉행을 방해하므로 고향을 떠나 여러 번 이사를 하며 피난처를 마련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대단히 순박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 안드레아는 교회 일에 참여할 나이가 되자 자주 서울을 오가며 자기 힘자라는 대로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으므로 교회 상황과 앵베르 주교의 근황까지 잘 알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3명의 서양인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배교자 김여상은 필요한 인원만 주면 자기가 그들을 잡아 바치겠다고 장단하고는, 지방으로 내려가 옛날 친구였던 자들을 찾아가서 헛소문을 다음과 같이 퍼뜨렸다. "서울에서는 똑똑한 교형들이 대관들 앞에서 성교회의 진리를 폈소, 천주의 은혜로 관장과 대신들까지도 눈을 떠서, 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적당히 설명해 주기만 하면 모두가 받아들일 마음이 되어있소. 자유의 때가 드디어 이르렀소. 그리고 주교님이나 신부님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온 조정이 분명히 천주교에 드러올거요." 이 말에 속아 넘어간 신입 교우들은 정 안드레아가 주교님의 처소를 알 것이라고 말하였고, 김여상은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똑같은 거짓말을 하였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춤을 출 듯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룻밤을 궁리하고 나서 자기 혼자 소식을 알아보러 가겠다고 말하여, 그는 김여상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안드레아가 주교의 거처에 이르렀을 때 앵베르 주교는 "내 아들아 너는 마귀에 속아 넘어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배교자가 이미 문 앞에 와 있다는 것과 이제 도망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신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주하였던 것이다. 주교가 붙잡힌 뒤에도 안드레아는 멀지 않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리라는 포교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 몇몇 교우들의 집을 가르쳐주어 그 신자들을 붙잡히게 하였다. 포교들은 또다시 그를 이용하여 모장, 샤스땅 두 신부도 찾아내려 하였으나, 아무리 바보같았던 그도 마침내 원수들의 모략을 간파하여 지금까지 속아왔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들을 비밀리 찾아보고 위험이 신변에 박두했다는 것을 일러주었으며, 고백성사를 받고 스스로 나아가 자수하겠다고 하였으나 신부들이 말렸으므로 몸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았다. 그후 안드레아는 배교자 김여상의 눈에 띄이게 되어 1839년 7월에 포교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안드레아는 주리를 틀리고 대고챙이로 찌르는 형벌을 받았으며, 100대의 치도곤, 매질 등의 형벌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받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다섯 달 동안 옥에 갇혀 괴로운 형벌과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1840년 1월 23일에 3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57. 민극가 스테파노, 회장(閔극가, 1887-1840), 교수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어느 외교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굳고도 온화한 성격과 바르고도 냉정한 판단력을 소유했던 그는 아주 어릴 때에 어머니를 여의였고, 그 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천주교에 들어와서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 20세에 이르러 어느 교우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곧 상처하였다. 재혼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부모 형제들의 강요에 못이겨 재혼하였지만, 딸 하나를 두고 아내가 세상을 떴으며, 그 딸 역시 얼마 아니되어 죽고 말았다. 그때부터 스테파노는 이리 저리 신자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을 격려하거나 가르치는 한편, 비신자들에게 전교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또한 그는 종교서적을 베껴주고 받은 돈을 자기 생활비와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니, 신부들은 그의 열성과 박애심을 높이 평가하여 회장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또 말과 모범으로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거의 끝날 무렵에 민회장은 어느 배교자의 밀고에 따라 체포되었다. 포장이 "이 교를 버리겠다고 하면 즉시 놓아주마" 하자, 그는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내 종교를 준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교하여 회두시키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성이 나서 치도곤을 매우 치게 하면서, "이 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니 사정없이 쳐라"고 소리질렀다. 이리하여 그는 치도곤 40대를 맞았다. 옥중에서도 스테파노는 형벌로 인한 상처를 못이겨 신음하면서도 배교자를 꾸짖고, 목숨을 아까와 하며 가족을 걱정하는 신자들을 격려하며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권면하였는데, 그의 노력이 눈에 띄게 효과를 내어 약한 신자 여러 사람이 배교를 철회하고 통회하였다고 한다. 그 이틑날도 그는 곤장 40대를 맞았지만 처음과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리하여 민스테파노는 옥에 갇힌 지 5, 6일 후인 1840년 1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음으로써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58. 허협 바울로, 군인(許협, 1796-1840), 옥사

 

허협 바울로는 훈련도감의 군인으로서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천주교 계명을 열심히 지키던 뛰어나 신자였다. 그는 기해년의 박해가 한창이던 8월 잡혀 포도대장에게 배교를 강요당하고 주리를 틀리고 대고챙이질과 70대의 곤장을 맞는 득 혹형을 당하였다. 그가 누구보다도 심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은 나라의 녹을 먹는 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는 모진 형벌을 받고도 그의 신앙심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가혹한 형벌이 몇 주일이나 계속되자,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살려 달라고 하며 배교하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래서 석방되어 나간 바울로는 곧 후회를 하고, 과실을 뉘우친 다음, 다시 재판관을 찾아가서 "나는 죄를 지었으나 지금은 그걸 뉘우칩니다. 입으로는 배교하였으나 마음으로는 신자였고 지금도 신자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잘못을 통회하여 다시 고문을 받겠다"고 말하자, 화가 치민 포장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몹시 괴롭혔던 것이다. 재판관은 "말로 취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네가 뉘우친다는 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더니, 대소변이 가득찬 통을 가리키며 "네가 참으로 뉘우친다면 여기 사발이 있으니 저 통에 있는 것을 떠 마셔라"하고 명령했던 것이다. 잘못을 크게 뉘우친 바울로는 서슴치 않고 그것을 한 사발 푹 떠서 단숨에 마시고 또 두 번째로 마시려고 하자, 이번에는 옥졸들이 깜짝 놀라며 "그만 둬라, 그만 둬"하며 그를 말렸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십자가를 내어 놓으면서 "네가 천주교를 정말로 배반하기 싫거든 엎드려서 십자가에 절하라"고 명령하였다. 바울로는 꿇어 앉아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얼마 전에 입으로 배반한 잘못을 뉘우치며 예수를 온 마음을 다하여 흠숭 예배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은 용기로 가득찼고 마음의 갈등도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후 그는 치도곤 130를 맞은 후유증 때문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때는 1840년 1월 30일이고, 나이는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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