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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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10-04 ㅣ No.2086

 

69. 현석문 까롤로, 회장(玄錫文, 1797-1846) 군문효수

 

현석문 까롤로는 1801년에 순교한 현계흠 베드로의 아들이고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경련 베네딕따는 그의 누님이며, 서울의 중인 계급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김데레사와 아들 은석이도 기해박해때 순교하였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선교사와 교우들을 위한 삶이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조선 땅에 성직자가 한 분도 없을 때, 그  유진길, 정하상 및 조신철 등과 의논하여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기 위하여 중국에도 다녀왔고, 샤스땅 신부의 복사로서 항상 수행하던 중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자수하려고 하였으나, 선교사들이 만류하며 오히려 살아남은 신자들을 돌보아 주는게 좋겠으니 숨어다니며 세심한 주의로써 포졸들의 손에 잡히지 않게 하라고 권하여 따랐던 것이다. 앵베르 범 주교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선교회를 현까롤로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는 주교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이재영이라고 하는 가명을 사용하여 다니면서, 새 신다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한편 각지로 돌아다니며 얻은 것으로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포졸들의 수색이 거의 없는 마을로 인도하는 등 동분서주하며 맡은 바 직책을 성의껏 수행하였다. 또 앵베르 주교가 수집했던 기해일기를 다른 동료들과 보완하여 순교자의 전기를 완성하였다. 또 신자를 북경에 보내어 선교자들과 연락을 맺어 보려고 애썼으며, 김 안드레아 신부가 부제 때에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상해로 길을 떠났을 때에도 함께 수행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김 신부가 거처하던 석전동의 집을 자기 명으로 등기하였는데,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김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버리고 다른 집을 사들여 전교자금과 성물들을 사초서동의 새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한지 며칠 뒤에 포졸들이 그를 잡으려고 전에 살던 집을 습격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사할 때에 현가롤로를 도와주고 그 후에도 2, 3명의 신자를 새 집으로 안내한 일이 있었던 짐군들이 사실대로 고발하게 되어 포교들은 곧 새 집으로 달려가 그를 체포하였다. 그때 그곳에 와 있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 우술임 수산나 등도 함께 붙잡히게 되었으니 대는 1846년 7월 15일이었다. 이리하여 까롤로는 중대한 반역 죄인으로 군문효수를 선고받아 9월 19일, 새남터에서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70. 한이형 라우렌시오, 회장(韓履亨, 1799-1846) 장살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덕산에 살던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헌신적이며 열성이 지극하여, 14세 때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지 몇 주일 후, 참으로 비상한 열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러 시간 동안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였고, 전에 범한 죄를 진실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주일과 축일에는 집에서 10여리 밖에 있는 신자마을에 가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는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는 21세 때에 신자 처녀와 혼인하고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지고을 인이 마을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신심만 두터운게 아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옷이 남루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옷을 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와 주막집 같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나치게 애긍시사를 한다고 하면, 그는 "헐벗은 이웃을 입히고 굶주린 이를 먹이는 것은 거저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천주께서 이자를 듬뿍 붙여 다 같아 주실 겁니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라우렌시오는 약간의 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일 파공을 철저히 지켰으며, 밤에는 날마다 한 시간 동안 묵상하였고, 사순절에는 매일 단식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그의 이러한 신덕을 보고는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가 잡힌 후 포졸들은 집주인이 이신규 토마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잡기 위해 먼저 그의 삼촌을 잡아 조카가 있는 곳을 물으니 이토마의 삼촌이 포졸들을 은이 마을로 안내하였다. 포졸이 도착하였을 때 이미 그 동네 신자들은 도망한 뒤였으므로, 그들은 라우렌시오의 집을 둘러싸고 온 가족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내 놓아주고 라우렌시오만을 포승으로 묶고 조롱하며 닥치는 대로 때렸다. 특히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어단 후 물매질을 하면서 배교하고 동교인을 대라고 협박하였다. 라우렌시오가 이를 거절하자 포졸들은 그의 두 다리를 결박하고 그 사이에 깨어진 접시며, 질그릇 조각을 끼우고 굵은 밧줄을 발목에 결쳐서 앞뒤로 잡아 당겨 살을 톱질하듯 하였다. 그러나 라우렌시오가 이러한 잔학한 고문을 잘 참아내며 신음 소리 조차 내지 않으므로 포졸들도 이에 감동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이 정말 천주교 신자가 되려면 한이형과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포졸들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는데, 포졸들이 말을 태워 주겠다고 하여도 이를 거절하였고, 또 상처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서 백여 리나 되는 산길을 맨발로 걸어 서울까지 갔다. 그는 서울에서도 전과 같은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순교했는데, 그의 죽음은 교수형 혹은 장살(杖殺)이었다고 한다. 때는 1846년 6월 20일이고,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71. 임치백 요셉, 사공 (林致百, 1804∼1846) 교수

 

임치백 요셉은 서울서 멀지 않은 한강변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모친을 잃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10여년 동안을 글방에 다녔고, 무술과 예도를 배워 향락을 즐기는 친구들과 상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유순하고 효심이 지극한 까닭에 덕을 거스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정을 이룬 후, 1830년경에 아내와 아들들이 먼저 입교하여 그에게도 성세 받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항상 "뒷날에 입교하겠다."고 말하며 미루기만 하였지만, 신자들이 깊이 신뢰하여 그들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 돕는 것을 무엇보다도 즐겁게 여겨 몸둘 곳이 없는 신자1,5명을 그의 집에서 살게 하였다는 것이다. 1835년에 박해가 일어나 마을의 가까운 몇몇 신자가 잡히게 되니,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하였고, 자진해서 포졸이 됨으로써 더욱 열심히 그들을 도와주었다. 1846년 6월, 선주였던 아들이 김대건신부를 따라 연평도로 나갔다가 함께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힌 해주까지 달려가 아들의 석방을 청원하였다. 때 황해 감사는 그의 요구를 묵살하고 도리어 그를 옥에 가두었다가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잡혀온 그는 포청의 옥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불타는 신부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어느날, 갇힌 신자들에게 "나도 오늘부터 성교를 믿겠소.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었소"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김신부는 그날부터 기도문을 가르쳐 요셉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전에 임요셉과 친하게 지내던 포졸들은 그의 목숨을 구하려고 배교하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천주는 나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시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하고 있고, 이미 죽은 사람이니 다시는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며칠 후 형리들은 그의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자식들의 처지를 보아서 배교하라고 말했지만 인정에 끌려 천주를 버릴 수 없다고 하자 형리들은 노하여 그를 거꾸로 매달고 물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형리들에게 "당신들은 죽은 사람을 때리니 헛수고만 하는 게 아니요"라고 태연히 말하였다. 그후 3개월이 지나 그는 곧 사형선고를 받으리라는 소문이 들리자 즐거운 마음으로 신자들에게 "나는 본래 아무런 공적도 없었는데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여러분보다 앞서서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할 터이니 여러분은 용기를 내시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후 포장 앞에 끌려와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제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옥에 온 뒤로부터 경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외워보아라." "아직 모두 외우지 못합니다." "십계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여기 있는 이 마티아처럼 유식해야 한다"고 하자 요셉은 머리를 저으며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자녀가 무식하면 효도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대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배운 것은 없으나 천주께서 저의 아버지이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포장은 그를 고문하라고 명하여 대꼬챙이로 요셉의 살을 찌르게 하고 세 번이나 주리를 틀게 하였다. 이 때 요셉이 신음소리를 내자 포장은  "만일 네가 그러한 소리를 내면 그것으로써 배교행위라고 보겠다."라고 소리치자, 요셉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잔악한 고문을 받아 결국 정신을 잃어 밖으로 끌려나왔던 것이다. 그 후에도 요셉은 거듭 고문을  받았으나 변함이 없자, 때려죽이라는 명령이 내려 정오부터 해질 때까지 몰매질을 가하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를 옥안으로 끌어와 목을 졸라 죽였으니 그의 나이 43세이고, 때는 1846년 9월 2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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