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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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10-14 ㅣ No.2121

 

95. 나신부 모방 베드로(羅佰多 , MAUBANT PHILIBERT, 1803∼1839) 군문효수  

 

모방신부의 한국 성(姓)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본명 베드로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백다록(佰多 )이라 하였다. 프랑스 '베시'(Vassy)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1829년5월13일 사제로 서품된후,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성으로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난 게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을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를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을 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이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가 1836년1월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16내지 17개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백13명에게 영세를 주고, 6백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도록 하며, 모임에서는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 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 전기등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모방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고,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김대건 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하에서 조선 내의 교육이 불가능함으로, 1836년12월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게 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1월15일, 샤스땅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를 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쇄약해져 있었으며,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절망적이었으므로 샤스땅신부로부터 종부성사까지 받았으나, 3개월 후에야 겨우 회복되었다. 1837년 말, 앵베르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어느 때보다도 효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범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9월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이 나이는 35세였다.

 

 

 

96. 정신부 샤스땅 야고보(鄭牙各伯, CHASTAN HONORE, JAC-OBUS, 1803∼1839) 군문효수

 

샤스땅신부의 한국 성은 정(鄭)씨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마르꾸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양떼 지키는 일로 부친을 도왔다.  그는 1823년에 신학교에 들어가 3년만에 신품을 받고, 이듬해에는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교육을 받고 프랑스를 출발하였으나 얼마동안 중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삐낭 섬에서 선교활동을 하던중,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파견되자 그에게 동행을 허락하였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를 여행하는 동안에 그는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모방신부로부터 입국의 안내를 적은 편지를 받았다. 1836년 말, 조선 교우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등의 안내를 받아 변문을 통과한 후,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께 기대합니다."하며 자신의 기쁨을 토로했던 것이다. 상복차림을 하고 15일동안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샤스땅신부는 모방신부를 만나 자신들의 봉헌과 희생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샤스땅신부는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어의 초보를 배우기 시작하고, 2개월 가량 성찰규식을 외운 다음, 조선말로 백 명 가량의 신자들에게 첫 고백을 받을 수 있었다. 그후 신부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성무집행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 샤스땅신부는 모방신부와 함께 열심히 노력한 결과, 1837년 한 해에 영세자 1천2백37명, 고해자 2천78명, 영성체한 사람이 1천9백50명이란 숫자를 기록하였다. 이윽고 기해년에 이르러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다시 시작되었다. 샤스땅신부는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맡은바 업무를 수행하던 중 주교가 체포되고, 샤스땅신부는 은신처에서 주교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이 주교의 권고로 그는 모방신부와 함께 관청에 자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21일 새남터에서 참수 당하니, 이때 샤스땅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97. 장주교 베르뇌 시메온(張敬一, BERNEUX FRANCOIS, SIM-EON, 1814∼1866) 군문효수

 

장 시메온 베르뇌 주교의 한국명을 장경일이고, 프랑스 망스의 어느 평범함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치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망스 대신학교에 입학했고, 1837년5월30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1839년7월15일에 그는 빠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게 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6월26일에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1841년, 그는 '통킹'으로 가는 도중에 베트남으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이 박해 중이라고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사형선교까지 받았으나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특청으로 석방되어 1843년8월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후 10여 년 간 갖은 열성으로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갔으나, 1849년에 요동 땅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로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854년8월5일, 교황 비오9세는 그를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한국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끝에, 다행히 조선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에서 4일만에 서울로 당도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경기도 지방의 60여개 공소를 상복을 입고 다녔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 안 신부에게 부주교의 성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직자 회의 결과 그는 1857년8월에 [장주교 제우윤시서]를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를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 서적이나  출판물을 대량 저술·정리, 출판하였다.  그리하여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는 증가하였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장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어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 박해를 일으켜 그 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학살되기 시작했다. 1866년2월23일, 다섯명의 포졸들이 주교댁을 급습하여 장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갔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장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신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메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이즈음에 김도리신부와 서 볼리외신부, 그리고 백 유스뜨 마리아 브르뜨니에르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3월6일, 장주교 일행은 참수형을 선고를 받고, 다음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래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장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러 있었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명의 군졸들은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다 갖추었다.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외치며 돌다가 장주교의 목을 칼로 내렸다. 장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진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와고개(瓦署峴)에 정성껏 장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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