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예수와 만난 사람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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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3-12-12 ㅣ No.9887

 

 

세상 사는 맛

 

 

사람들은 나를 두고 미쳤다고 한다. 전에는 죄인이라 하더니 지금은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거나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고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비평이 두려웠다면 처음부터 세리란 직업을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다시피 이 나라에서 세리 노릇을 한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만한 일이 못된다. 나도 유다 사람이다. 나의 선조들은 대대로 예리고에서 살아왔다. 유다 사람으로 태어나 유다 사람의 재물을 모아다가 이방인 로마에게 바치는 일을 좋아서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변명처럼 들리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 세리가 되어 세관을 드나들 적부터 나도 누구 못지 않게 고민이라면 고민을 했다. 과연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민족의 반역자라는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이 노릇을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도 나의 삶은 나를 밀어다가 세관 깊숙한 곳에 던져 넣었다. 아니, 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깊은 구렁에 떨어져 있었다.

“세리 자캐오 녀석!”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어른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렇게 불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은 ‘자캐오’라는 나의 이름을 없애 버렸다. ‘세리 녀석’이 나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나를 따돌려 놓는 것과 동시에 나도 그들을 등져 버렸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의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태어났고, 태어났으므로 살아야만 했다. 내가 이 식민지 정권 아래 세리가 되어 동족의 미움을 사며 살아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의지의 작용만은 아니었다. 운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어떤 힘에 의하여 나는 이 헤어날 수 없는 구렁에 빠져든 것이다. 물론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다만 이 척박한 식민지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나의 삶을 살기 위하여 세리가 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내가 토색질을 일삼고 강제로 세금을 많이 거둬 로마에 내고 남은 돈을 착복했다고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그들의 비난은 잘못된 바가 없다. 단지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긁어모았고 로마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내가 못할 짓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했다. 돈과 로마의 신임! 그것이 나의 생명줄이었다. 동족? 그것은 다만 나에게 ‘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말 못 할 소외감만 안겨주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존재일 뿐이었다. 나도 유다 사람이다. 어렸을 적부터 회당에 나가 성경을 배웠다. 야곱이 에사오의 축복을 가로챘을 때, 그는 형에게 아우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했던가? 장인의 재산을 빼돌릴 때 그는 정정당당했던가? 아니다. 형제지간의 윤리라든가 인간사회의 도덕이라는 것도 실은 가지고 있는 자들의 논리일 뿐, 빼앗긴 자 또는 지금 빼앗기고 있는 자에게는 거추장스런 허물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나는 세리인 자신의 생각을 단단하게 무장시키고 갈수록 더욱 악랄한 수법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그럴수록 로마로부터 나를 유능한 세리로 인정받았고, 어느 날 나는 예리고 세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나는 마침내 입신출세에 성공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돈은 스스로 새끼를 치는 양떼처럼 버려두어도 불어났고 그럴수록 내 삶의 근거는 든든하게 다져지기만 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대 로마 제국의 배경을 등에 업고 있는 나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로마가 무너지지 않는 한, 돈이 그 위력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나의 삶은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단단해져야만 하는 나의 삶이 오히려 갈수록 더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었다. 도무지 세상 살 맛이 없었다. 내 삶의 이론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았다. 로마가 흔들리는 기색은 없었다. 돈의 위력이 상실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이 세월과 함께 더욱 강해지리라는 것은 내일 아침 동산에 해가 뜨리라는 것만큼 확실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확실한 사실에 근거한 나의 삶이 갈수록 흔들리고 불안한 까닭은 무엇인가? 동족을 배신한 까닭인가? 아니다! 나에게는 사실상 배신할만한 동족이 처음부터 없었다. 동족이 나에게 준 것은 모멸에 찬 시선과 비난과 조롱 그리고 따돌림뿐이었다. 배신을 했다면 내가 그들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배신한 것이다. 이미 버림받은 자식이 그 부모를 떠나는 것도 배신인가? 그렇다면 무엇일까?

내가 딛고 선 바탕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듯한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나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나자렛 마을의 목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집을 나와 광야에서 시련을 겪은 뒤, 홀연히 랍비가 되어 다시 마을에 나타난 그는 갈릴래아 지방을 본거지로 삼고 하느님이 다스리는 새 나라의 도래를 전하며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골자기로 다니는데, 그 자취가 마치 바람과도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로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점은 그와 함께 다니는 동지들이 주로 어부나 노동자들 그리고 뜨내기들인데 그 중에는 전직 세리도 섞여 있다는 소문이었다. 회당에서 가르칠 때에는 그 당당함이 하늘과 같아 아무도 거역할 수 없고, 그 권위는 여느 율법학자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하건데, 들려오는 그에 관한 소문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큰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레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세리와 더불어 식사를 한다고 비난하는 그 마을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성한 사람들한테는 의원이 필요 없다. 의원은 병든 사람한테만 필요하다. 나는 의원이다. 의인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죄인들을 돌보려고 온 사람이다”라고 대꾸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나의 가슴은 마구 설레는 것이었다. 더구나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사이인과 세리를 비유로 이야기하며 “하느님이 인정한 사람은 바리사이인이 아니라 세리였다”라고 못 박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호기심이나 그리움의 정도를 넘어 일종의 동지의식과도 같은 것으로 비약했다.…

그 날, 예리고 마을의 돌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만나게 되기 전부터 나에게 그는 친구요 형제였다. 우리가 만난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찾아 나서지 못했다. 그가 있는 곳으로 내가 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로 왔다. 나는 그를 기다렸고 그는 나의 기다림을 나에게 옴으로써 채워주었다. 이 점을 당신들에게 거듭 말해두고 싶다. 그는 동지들을 불러 모으는 대신 동지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를 채운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준 사람이었다. 그는 이 땅에서 영원한 나그네였다. 그에게 밤마다 돌아가 머리 둘 집이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는 대신 찾아갈 집이 가는 데마다 있었다. 그는 흐르는 물과 같았다. 자기보다 더 낮은 곳이 있으면 시각을 다투어 그리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는 맨 아래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채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그들, 그러나 키가 작은 나에게는 뚫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그들이 그를 독점하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상 어느 놈이 그를 독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눌렀다. 내가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때껏 살아온 내 삶의 방식이었다. 세상이 나를 버리면 나 또한 세상을 버린다. 마을이 나를 따돌리면 나도 마을을 등진다. 나는 그 일행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때 길가에 오래 묵은 돌무화과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틈만 나면 올라가 놀던 나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옛 친구처럼 그는 조금 지친 모습으로 여전히 두 팔을 옆으로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 나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꼬마 자캐오야, 이리 올라오렴.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보여.” 나는 벌써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친구의 품에 안기듯, 아직도 나의 손과 발바닥에 익숙한 나무둥치를 안고 기어올랐다. 나는 돌무화과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예수 일행은 길을 따라 천천히 나무 아래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당히 키가 큰 장대한 사나이였다. 텁수룩한 갈색 수염이 아무렇게나 아래턱을 감쌌고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비록 먼발치에서였으나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렇다. 저 사내는 아무것도 꺼리지를 않는구나! 거침이 없어! 저 붉은 얼굴과 붉은 맨손을 보면 알 수 있지. 저 사내는 마치 사람의 모양을 한 자유의 모습이군. 자유!” 그러나 이렇게 그를 내려다보며 멋대로 한가로이 생각에 잠길 수만은 없었다. 그의 일행이 바로 내 발 밑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며 나에게 말했다. 이글거리는 듯한 그의 눈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캐오 형제, 내려오시오. 오늘은 당신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집시다!” 나는 굴러 떨어지듯 나무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그의 넓은 가슴에 내 머리가 닿았다. 그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먼지와 땀으로 지저분했지만 따뜻하였다. 나는 정신없이 그를 안내하여 집에 이르렀다. 이 넓은 천지간에 나에게 신세를 지겠다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나도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또한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준 유일한 사람, 그가 바로 예수였다. 그는 나에게 웃으며 소리 없는 말로 속삭여 주었다. “자캐오 형제, 나는 형제가 사람임을 당신 자신과 온 마을에 알리러 왔소. 당신한테도 더운 피가 흐르고 있으며, 골짜기를 찾아 내려갈 인정이 괴어 있음을 보여주려고 왔소. 이제 그것들을 풀어놓으시오. 묶여 있는 당신 자신의 사람됨을 해방시키시오. 그런 다음 내가 주는 자유로 형제의 가슴을 채우시오. 이제부터 형제는 자유요. 아무것도 형제를 더 이상 묶어둘 수 없소. 나에게 시원한 물 한 대야 퍼 주시오. 내 더러운 발을 좀 씻어야겠소.” 물 한 대야라니! 어찌 내가 그에게 겨우 물 한 대야만을 줄 수 있겠는가? 미리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온 집안사람을 동원시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을 했다. 그날 밤은 참으로 흥겹고 소란스런 잔치로 깊어갔다. 음식은 남아돌았고 모두들 질탕하게 먹고 마셨다. 나는 거나한 기분으로 그에게 말했다. “예수 형제,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로 기쁩니다. 오늘밤, 내가 한 가지 결심을 하였소. 내 재산의 반을 뚝 잘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또 혹시라도 토색질 하거나 속임수로 빼앗은 재물이 있으면 법이 정한대로 그 네 배를 갚겠소!” 그러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물었다. “자캐오, 그게 정말이오?” “암, 정말이고 말고, 내가 지금 술에 취해 이러는 게 아니오.” 그러자 예수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 되었소. 자캐오 형제, 오늘 당신은 잃었던 당신을 찾았소.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 자! 우리 모두 자캐오 형제의 새로운 생일을 축하하는 뜻으로 건배합시다. 우리의 새로운 동지를 위하여!” 우리는 술잔이 넘치게 부어 마셨다. 밤이 새도록 마셨지만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이윽고 새벽하늘에 별빛이 이울기 시작할 무렵, 예수와 그의 일행은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누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갔다. 나는 내 방에서 이불을 꺼내어 천연덕스럽게 잠들어 있는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더 이상 편할 수 없는 자세로 그는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 무엇으로도 묶어놓을 수 없는, 태산처럼 무겁고 바람처럼 가벼운 자유! 바로 그것이었다. 잠든 얼굴로 그는 나에게 속삭여 주었다. “무엇을 그리 움켜잡고 있었는가? 불쌍하게도! 놓아버려, 모두 놓아 버리는거야. 그리고 하늘이 주신대로 살아가게. 그 순간 우리를 떠났던 것들이 모두 돌아온다네. 이게 바로 세상사는 맛이지! 허허허….”

그 날, 예수 일행은 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나는 곧 그와 한 약속을 지켰다. 창고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팔아 나의 가난한 이웃을 샀다. 사람들이 그런 나를 두고 미쳤다고 하였다. 예수라는 미치광이한테서 광기가 옮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돈을 긁어모은다고 비난하였고, 지금은 내가 돈을 버린다고 비웃는다. 나는 그들의 비웃음에 조금도 마음 쓰지 않는다. 내 가진 소유가 모두 없어져 거지가 된다 하더라도, 그가 가르쳐준 삶의 맛을 포기하고 다시 돈을 붙잡을 수는 없다. 가난하게 될수록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난다는 이 신기한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마침내 맨손이 될 때, 나는 어쩌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그의 몸이 되어 그가 걸었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돌무화과나무 가지 위에서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자캐오를 생각하면 내 가슴은 터질 것만 같다.…

세계는 실로 하느님이 지으신 곳, 살아갈 만한 터이다. (루가19,1~10)

 

이현주 지음, “예수와 만난 사람들”(생활성서사 출판) 중에서

첨부파일: Jesus-1.hwp(17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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