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2월3일[이콘.티츠빈의성모]성 안스가리오 주교 축일♬Haydn-Cr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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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2-03 ㅣ No.926

"티츠빈(Tichwin)의 성모"

페터스부르그.19세기.22x18cm 금은세공을 한 액자.

 

전설에 의하면 황홀한 티히빈스카야의 원상(原像)이 1383년 티츠빈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성당이 발견된 장소에 사람들은 교회를 세웠다. 17세기초 스웨덴이 러시아를 공격하려고 하였을 때, 이 티츠빈의 은혜스러운 그림은 러시아를 수호하였다. 1617년 스웨덴과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은혜스러운 그림을 깊이 숭상하였다.

 

성모는 머리를 약간 왼쪽으로 숙이고 왼손으로 신성한 아기 예수를 안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아기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아기 예수는 오른발을 왼쪽발에 대고 서있다. 그의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기 위하여 올리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기록문서를 쥐고 있다.

 

그림이 그려진 목판은 도금과 세공이 된 은판(銀板)으로 덮여 있으며. 가장자리는 나무 액자로 되어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금은선 세공으로 의복을 꾸몄다.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후광(後光)은 칠보로 되어 있다. 보존상태가 아주 좋은 희귀하고 높은 수준을 보이는 작품이다.

’옵친니코프(Ovtschinnikof). 러시아 황제의 궁정보석공.

참고 : "Russische Juwelierkunst", Verlag der Wissenschaft, 모스크바 1974.

 

 

축일 : 2월 3일

성 안스가리오 주교

Anscharius (801-865) 함브르크

 

’북유럽(스칸디나비아)의 사도’는 성인이 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인이 되었다.

 

9세기 초 프랑스 아미앙 근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코르비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딕토회 수사 신부가 되었다. 3년후 덴마크의 왕이 개종했을 때 그는 그 나라에 가서 3년 동안 선교 활동을 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평소 관심있던 스웨덴이 그리스도교 선교사를 요청하자 안스가리오는 그곳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해적들에게 잡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년이 채 못 되어서 그는 다시 소환되어 831년에 코베이의 대수도원장 겸 함부르크의 1대 주교가 되었고 교황은 그를 스칸디나비아 선교단의 사절로 임명했다. 루드비히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북부 지역 선교 활동 기금이 중단되었다. 안스가리오는 함부르크에서 13년간 일한 후에 북방인들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보았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이교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북쪽에서 새로운 사도직 활동을 지도했는데 그 자신이 스스로 덴마크로 여행하면서 유트랜드의 왕 에릭을 개종시키는 데 도구가 되었다. 스웨덴의 왕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되돌아오도록 허락했다.이같은 성공은 그의 뛰어난 설교력, 엄격하고 거룩한 생활 그리고 수많은 기적의 힘이었다

 

다네스가 845년에 함부르크를 파괴하자, 브레멘의 주교 임명장이 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스웨덴과 덴마크로 돌아가서 놀라운 정열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사후에는 그 모든 일이 중단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아직 그리스도교회가 뿌리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848년에 브레멘의 첫번째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후에 교황 니콜라오 1세에 의해 함부르크 교구와 통합되었다.

 

안스가리오는 "북부의 사도"로 불리며, 스칸디나비아의 첫번째 사도로 칭송받으며,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안스가리오 혹은 안스카리오(Anskar)라고도 한다.

 

안스가리오에 대해 연구한 역사가들은 그가 뛰어난 설교가요,겸손하고 금욕하는 사제였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헌신적이었으며, 그들의 발을 닦아 주고, 식탁에서 그들을 기다림으로써 주님을 본받았다. 그는 순교하고픈 그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독일의 브레멘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 스웨덴은 다시 이교로 돌아가서 2세기가 지난 후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이교로 머물러 있었다.북유럽의 수 많은 민족과 종족간의 문화적 연대감이 하나의 종교로써 이루어지기 까지 수 많은 세월이 지나야만 했습니다.

 

역사는 누가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을 기록한다. 그렇지만 안스가리오와 같은 사람들의 용기와 인내심은 본래의 타고난 용기와 끈질긴 선교가 일치되어 있는 든든한 바탕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안스가리오의 생애는 하느님은 구부러진 줄에다가 똑바로 글을 쓰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도직의 결과를 배려해 주신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도 자신의 순수성을 살피시는 것이다.

 

안스가리오는 자기 동료들 중에 하나가 성인들이 이루어 낸 기적들에 대하여 자랑을 늘어놓자 이렇게 꾸짖었다.

’만일에 내가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자격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 단 하나의 기적을 나에게 허용해 주십사고 청하겠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으로 나를 착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에서

(Nn. 23-24)

 

그리스도의 신비를 확신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신앙을 전파할 각자 응분의 의무가 부과되어 있지만, 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제자들 중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사 당신과 같이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을 선교를 위해 제민족에게 파견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당신 원하시는 대로 영능을 나눠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주께서는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각자의 마음 안에 불어넣어 주시며, 동시에 또한 전교회의 책임인 복음 선포의 임무를 자기의 본임무로서 받아들이는 가지가지의 회를 일으키신다.

 

사실 균형 있는 천성을 타고 났으며 마땅한 천품과 재능을 갖고 선교의 임무를 받아들이기로 준비된 사람은 그가 방인이건 외국인이건 또는 사제이건 수도자이건 신도이건 다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정당한 권위자로부터 파견되어 신앙과 순명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로 떠나간다. 그들은 복음의 일꾼으로서 불리운 사명을 위해 선택 분리된 사람들이다.

 

이는 외교인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성화되어 성의에 흡합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이다.그러나 사람은 혈육과 의논치 않고 복음 사업에 자기를 전부 바쳐, 부르신 하느님께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응답은 성신으로 말미암아 자극되고 굳세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파견된 이는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명 안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는 일생 동안 자기의 소명을 지켜 내고 자기 자신과 전에 자기 소유였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또 그는 제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자기가 그 대리로 행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신빙성 있게 전하여 알게 할 것이며 십자가에 걸려 넘어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때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말하여야 한다. 마음이 양순하고 겸손하신 스승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리스도의 멍에의 경쾌함과 그 짐의 가벼움을 드러내야 한다.

 

참으로 복음적 생활에 의해 많은 것을 인내하며 관용과 인자 그리고 거짓없는 사랑으로써 만일 필요하다면 자기 피를 흘리기에 이르기까지 주께 대한 증거를 해야 한다. 그는 환난과 극심한 가난을 수많이 경험하면서도 즐거움이 거기 넘쳐흐르는 것을 깨닫기 위해 힘과 용기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것이다.

 

♬Haydn-Credo in unum D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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