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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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09-14 ㅣ No.1971

 

14. 장성집 요셉, 환부(張성집, 1786-1839), 옥사

 

장성집 요셉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호조에 속하는 광흥창의 일을 본 적도 있으며 두 번이나 결혼하였으나 두 번 다 상처한 뒤로는 어느 약국에서 일을 보며 지냈다. 원래 그의 성품은 온화하였지만, 어려운 처지 때문에 속세 생활에서 향락만 추구하던 중, 나이 서른에 천주교를 알기 시작하여 한때 열렬한 예비신자로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그는 천주강생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차츰 냉담해지더니 마침내 천주교 연구를 내던지고 돈벌이에 급급하였고 그전의 생활로 되돌아 가버렸다. 그러다가 어느 친구가 그 의혹을 밝혀주니, 그는 자기의 과거 허물을 통회하여, 그전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성서를 읽었으며, 세속의 유혹을 더 잘 피하기 위하여 외교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집에 들어 앉아 문을 닫아 걸고, 굶주림과 추위에도 상관않고 기도와 공부에만 전심하였다. 이때 주위사람들이 이전처럼 출입도 하고 몸을 돌본다해서 나쁠게 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넉넉한 살림을 해보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 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 참아 받음으로 저는 죽은 위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그는 1838년 4월에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박해가 시작되어 많은 신자들이 고문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매우 감탄하며 자기도 순교할 거룩한 원의가 불타올라 자주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5월 18일에 밀고당하여 체포되었다. 이때 열병을 앓고 일어난 다음이라서 가마에 태워 가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걸어서 포졸들을 따라 포청으로 갔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해가 돋을 무렵인데도 요셉은 자기를 부르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 "죽어야 마땅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는 아무 형벌도 주지 않고 버려둔단 말이요"하고 여러 번 항의까지 하였다. 그후 형리들이 아무리 꾀를 쓰고 포악하게 다루어도 소용이 없었고, 5월 26일에는 치도곤 25대를 맞은 후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5월 26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15. 김 바르바라, 과부(金 바르바라, 1805-1839), 옥사

 

김바르바라는 어느 시골의 가난한 농부집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순하고 또 신뢰심이 있던 이 소녀는 부모를 통하여 성교회를 알고 있던 중, 13세 때에 서울의 어느 부자 신자집의 하녀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열심히 성교회를 믿으며 동정을 지키길 바라고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찾아와 딸에게 훌륭한 자리가 나서 "나는 벌써 승낙을 했으니 너도 시집갈 준비를 하라" 고 하면서, 마치 결혼 상대가 신자 청년인 것같이 꾸며 결혼하기를 강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된 사람은 완고한 비신자였으므로 그 사이에 태어난 여러 자녀 중 딸 진주 하나만 영세 시킬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남편을 입교시키려고 15년 동안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에 남편을 여의고 조선에 대로 들어온 서양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전보다 더 열심한 마음으로 기도와 선한 일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교우들 사이에 바르바라 또는 진주 엄마로 널리 알려졌다. 1839년 3월경, 그녀는 자신이 살던 집 주인과 함께 잡혀 포청으로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형조로 옮겨졌다. 그 동안에 배교하라, 동교인을 대라는 명령을 거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사지가 부러져서 늘 고생했으며,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시졌지만,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쇠약해진 몸이 열병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3개월을 고생하다가 옥 마룻바닥에 누워 35세의 일기로 옥사한 것이다.

 

 

 

 

16. 이 바르바라, 동정(李바르바라, 1825-1839), 옥사  

 

이바르바라는 서울 청파동에서 살던 교우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두 숙모인 이영희 막달레나와 이정희 바르바라에게 양육되어 열심히 믿음을 기키며 자라났다. 그녀가 15세 되던 1839년 박해가 일어났고, 4월 11일에 두 숙모와 함께 잡히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포청에서 받은 무수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형조로 옮겨졌고, 형조판서는 이바르바라를 배교시키기 위해 때로는 무서운 말로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며 여러 가지 꾐으로 그녀를 유혹해 보았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아니하고 그 뜻을 굽히는 표정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형관은 "나이 어린 것이 요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형조에서 차단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보아 이바르바라를 나이가 어리다는 명목을 붙여 포도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던 중 불행하게도 바르바라는 옥중에 퍼져 있던 전염병을 앓게 되었다. 열병에 걸린 이바르바라는 1개월 가량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또 약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운명하여 순교하니, 때는 1839년 5월 27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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