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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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09-19 ㅣ No.2010

 

오늘은 한국 교회 순교자 분들 중에 굵직굵직한 분들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모진 고문을 이겨낸 김효주 아녜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 2대 신부님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그리고 한국 초대교회에 신부님을 모셔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이렇게 세분입니다.

 

 

 

30. 김효주 아녜스, 동정(金孝株, 1816-1839), 참수

 

김효주 아녜스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마을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사을 떠난 후, 그녀의 어머니는 6남매의 자녀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한 신자생활을 하였다. 아네스는 성교회에 입교한지 오래지 않아 벌써 탁월한 모범을 보이더니, 언니 골롬바와 동생 글라라와 함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고 아름다운 덕을 쌓았던 것이다. 이들 자 매는 모친을 잃은 뒤에는 서울에서 20리 가량 떨어진 용머리 마을의 오빠 집에서 살고 있었다. 5월 3일, 포졸들이 서울에서 20일 떨어진 곳에 있는 김 안토니오의 집을 포위했으나, 그들이 올 것을 눈치챈 안토니오는 가족을 데리고 피신한 후였고, 그이 집에는 김 아네스와 골롬바 그리고 세 살 된 어린아이만 남아 있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포장은 아네스 자매를 어르기도 하고 별별 약속을 다하며 배교시키려 하였으나 얻은 것은 거절 뿐이었다. 이에 포장은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니 아네스는 9월 3일에 순교한 6명의 신자 중에서 가장 악독하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신자들은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 포졸들과 관원들이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였지만, 김 아네스는 큰 소리 한번 내기 않고 침묵 속에서 기도를 드리며 마음속으로 우리 구세주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포장은 이와 같이 훌륭한 항구심이 어떤 마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하며 등에 몇가지 주문을 쓰게 하고, 불에 싯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그 글자들을 열세군데나 뚫게 하였디만, 이러한 형벌에도 그녀는 전혀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후 포졸들은 아네스를 끄집어 내어 학춤형을 가하며 온갖 비웃음과 욕설을 퍼부었지만, 아네스는 용기를 내어 그 괴로움을 달게 참으며 굳게 마음을 가졌고 더욱더 열심히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 바치며 묵묵히 참아 받았다. 이러한 형벌을 가한 후, 포장은 옷을 벗긴 채로 그녀를 죄수들의 감방에 들여보내 갖은 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정녀들의 천상배필이 그녀를 구원하러 오셔서 초인적인 힘을 넣어주어 한 사람이 남자 열 사람의 힘을 능가할만큼 힘이 강하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눌려 마침내는 옷을 돌려주고 그녀를 여자 감방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5월 9일, 김 아네스는 언니인 김 골롬바와 함께 형조를 이송되었고, 5월 12일에는 형조판서 앞에 출두해서 그동안 감옥에서 당한 여자로서의 모욕을 형조판서에게 호소하자, 형조판서는 이같은 처사를 저지른 포장과 포졸들을 처벌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여교우들은 악형보다도 더 괴로운 그와같은 모욕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아네스는 언니 골롬바 보다 먼저 순교의 칼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39년 9월 3일이요, 나이는 24세였다.

 

 

 

31. 최경환 프란치스코, 회장(崔京煥, 1805-1939), 옥사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으로 충청도 홍주군 다래골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부교의 계명을 지켰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위사람들 속에서 참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訟事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들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후 그는 이리저리 옮겨 살며 생활하다 마지막으로 자리잡은 곳이 과천 고을 수리산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며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토마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였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람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지방에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 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은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복 조카 최요한은 놀라,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하겠느냐?"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며 누워 잤다. 해 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죽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백 40도와 곤장 1백 10도를 맞았는데, 많은 다른 교우들은 석방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 뿐이었다. 그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 숨을 거두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나이는 35세였다.

 

 

 

32. 유진길 아우구시띠노, 역관 (劉進吉, 1791-1839), 참수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는 선조 때부터 당상 역관을 지내온 중인 계급의 부자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심히던 그는 20세 이전에 이미 유식하다는 평판을 들었지만, 세사으이 영광가 쾌락을 제쳐두고 오로지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던 것이다. 그는 10년 이상이나 불교와 도교를 통하여 인간과 세상의 기원 및 종말을 깨우치려고 노력하던 중, 그는 당시 훌륭한 양반집의 많은 학자들이 천주교를 믿는다 하여 죽임을 당하나 즐거운 낯으로 죽는다는 말을 듣고는 천주교야말로 참된 종교라고 여겨 천주교에 관한 책을 구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자기 집 장롱에 바른 헌 종이에 영혼, 각혼, 생혼이란 글자가 쓰여져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그것을 때어 앞뒤를 맞추어 보니 그것이 곧 천주실의라는 책임을 알았다. 그때 그는 정귀산이란 이가 천주를 연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를 찾아가 교리를 물어 보았으나, 정귀산은 대답하기를 피하고 서울에 사는 홍암브로시오를 소개해 주었다. 유진길은 곧 홍암브로시오를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교리서를 얻어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천주교의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하상은 동료 교우들을 모아 선교자 영입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후 오래지 아니하여  그는 정하상 바울로를 알게 되어, 1824년에 정바울로와 함께 사신의 역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갔다. 그는 구베아 주교로부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조선에 선교 신부를 보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이듬해인 1825년에는 정하상, 이여진 등과 함께 로마 교황께 편지를 올려 조선 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하루 빨리 신부를 보내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이 편지 덕분으로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이어서 선교사들고 입국하게 되니, 1833년에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고, 뒤를 이어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 그리고 앵베르 범 주교가 입국하게 되니 복음의 씨앗이 움틀 무렵 해로운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교회의 주요인물이었으므로 즉시 체포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형제와 친지가 찾아와 배교를 강요했으나, 그는 "나 때문에 당신들이 고초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대단히 마음이 괴롭지만, 천주를 안 뒤에 그분을 배반할 순 없으며 육신의 사정보다도 내 영혼의 구원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 교우가 되십시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포장이 그에게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자, 그는 "서양 선생들이 우리 나라에 오신 것은 오직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지키게 해서 영혼을 구제해 주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 도리를 전하여, 죽은 후에 지옥의 영원한 괴로움을 면하고 천당에 올라가 끝없는 진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교를 전하려고 생각하면서 어찌 스스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만약 명예와 돈과 쾌락을 구하려면 무엇 때문에 훌륭하고 돈 만흥 고국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면서 9만리 먼 곳에 있는 이 나라에 왔겠습니까? 그들을 맞아들인 자는 바로 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는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은 죄로 주리형과 줄톱질형을 받았다. 이리하여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때는 1839년 9월 22일이요, 나이는 4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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