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돌아보면 모두가 그리움인 것을 (부끄러운 고백 제3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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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준 [bopark] 쪽지 캡슐

2005-06-17 ㅣ No.5532

어찌됐던
세월이 약이라고 한 달 두 달 갚아 나가는 빚덩이는

점점 줄어 들었고,

결국 0여년 만에 청산을 하게 되었지만,

일 원짜리 한 장 만져 보지도 못하고

당시의 금액으로는 거액이었던 돈을 갚기 위하여

매월 은행에 갖다 바치는 심정은

오로지 그 친구를 만나면 죽여버리고 싶은 복수심에 불타 있었지요.

 

고백성사를 보아도 고백실을 돌아 나오면

바로 미움이 불꽃처럼 일어 났지요.

결국 다섯 번의 고백성사를 본 후에야 비로소 용서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 친구를 통하여

당신께 더욱 가까이 불러 주시려고 하셨던 것이 아닌가?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불행과 행복은 같이 온다고 했던가?

어려운 고비를 이어가고 있는 중에

그토록 애타게 자식을 기다리던 우리 부부에게

결혼 7년 만에 하느님께서 새 생명을 허락 하시었고,

부부는 어려운 중에서도 기뻐서 어찌할 줄 몰랐었지요.

 

당시 병원비보다는 가족들이 많이 찾아와

산모는 병원에 두고 음식점에 가서 밥먹은 돈이

더 들어가버렸으니....


용하다는 한약방을 찾아 다니며 한약도 먹어보고, 

심지어 부처님께 3,000배를 올리며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이 내용은 당시에는 몰랐었으나, 나중에 큰 놈을 낳고 나서 내자가 처형과 함께 00절에 가서 기도를 했었노라고 이야기해서 알게 되었음, 내자는 결혼 전 도봉산에서 8년동안 도(?)를 닦은 전력이 있음 )기도를 하였으나 별무효험이라...

인내하며 기다린 덕분이런가?

속끓이며 살아온 시간들을 첫 아이를 갖게 됨으로

집안에 다시금 활기가 살아 났고,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이셨음에도

무척 기뻐하셨었지요.

 

부글부글 끓어 오르던 분노도 어느정도 진정이 되어 갔지요.

9일 기도가 끝나고 가압류 문제도 해결되자.
조금은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었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주일 미사만 왔다리 갔다리

하는 발바닥(?) 신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하면서 살게 되었지요.

미사를 가도 누구하나 아는 사람이 없고 보니

아이를 데리고 로비에서 왔다갔다하다 보면 어느새 미사는 끝나곤하였지요.

(사실 당시에는 전입교우가 와도 누군가 방문을 하여 성당에 대한 안내도 해주지 않았고, 아파트 문화라는 것이 서로가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곳이라서 더더욱 어울리기가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듯 싶습니다)

 

4탄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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