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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모두가 그리움인 것을(부끄러운 고백 제10탄: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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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준 [bopark] 쪽지 캡슐

2005-07-20 ㅣ No.5638

그 즈음 성당에서는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정재우 세바스티아노 신부님이 활성화를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셨고,

 

저는 되먹지도 않은 글들을 올리면서 일약 스타(?)가 되기도 하였지요.
지금까지 중계동 성당 홈페이지 조회 건수 중

전무후무한 기록인 560회 정도를 기록한

 

"아시나요? 천 원의 신비를..."이라는 글은

당시 디스 담배 한 갑이 일 천원 이었음에 일주일에

칠 천 원을 연기되어 날리면서도

 

주일 헌금 일 천 원씩 내면서 신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많은 분들을 비유적으로 비판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에서 그런 용기와 용감함(?)이 생겼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정재우 세바스티아노 신부님을 통하여 한 마음 한 몸 운동본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사후에 시신내지는 장기기증을 결심하고 서약서를 쓰던 날,

 

저의 단호한 결심에 내자는 말없이 동의해주었고,

우리집 큰 놈은 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도

 

무슨 예감이 있었던지 "아빠 그거 취소하면 안 돼?"라며

손도장 찍기를 머뭇거리기에

 

 "사람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

내가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고, 의학발전을 위해서

해부학용으로 쓰인다면 죽은 다음에 영혼은 하늘나라로 갈 것이고,

몸뚱이는 통나무가 되어 어차피 썩어 문드러지고

 

구더기의 밥이 될터인데 무엇이 두려우랴?

 

애비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 다음에 커서 너가 번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자,

큰 놈은 눈이 둥그레져서 서약서에 무인을 찍었는데

 

저 어린 것이 무얼 안다고

애비가 이토록 흥분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자괴감마저 들었지만 다시 큰 놈에게 말했지요.

'이 다음에 애비가 죽거들랑

어차피 시신도 없이 장례를 치루어야 하지만

먼 훗날 애비의 선택이 후회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터이니

너무 슬퍼하지말거라'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해놓고 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지만

속이 후련하드만요.

 

이러저러한 일로 세월은 또 흘러갔고, 지역장의 임기도 만료가 되었으나

누구 한 사람 선뜻 나서서 맡겠다는 사람도 없기에,

 

'지역장을 맡으면 하늘에서 금은 보화가 많이 떨어진다'고

농담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왠 핑계거리들은 그리도 많은지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들이었지요.


울며겨자먹기로 또 연임하게 되었고

'이번 한 번만 더하면 정말로 그만한다'고 못을 박았고,

 

다른 형제들에게도 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한다는

저의 논리 아닌 논리로 차기를 준비시켰지요.

 

사실 성당일은 자매님들이 많은 일을 하시지만

어떠한 직책을 맡으면 형제들도 개인생활이 거의 없고보니,

서로가 안 맡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생각으로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느꼈던 것은

직장에서는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고

직원들이 상하조직체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위에서 지시하는대로 따라가면 되는데,

 

성당에서는

여러 가지 처해 있는 상황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보니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고민도 되고,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받을까?

생각해보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 조심스러웠음도

부인 못할 현실이었지요.

 

집안의 행사를 제켜두고도

성당에서 짜여진 일들은 해나가야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지만 다시 맡아서 나름대로 관록(?)을 쌓아갔지요.

레지오에서도 한 두 사람이 이사가기 시작하더니

15명의 단원이었던 것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어느새 막내였던 제가

 

회계를 거쳐 서기, 부단장을 두루 거치고, 단장이 되어 있었으니,

구역 일 하랴, 레지오 하랴, 직장일 하랴, 정신 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날 문득 이사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특히 어떠한 행사를 해야하는데 말로만 협조 한다고 해놓고,

실제로 전혀 나오지도 않고

뒤에 앉아서 "잘했네, 못했네"라고 평가하며

입방아를 찧어대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말로 그만두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러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고 보니

권태로움이 오기 시작했고, 저는 그럴 때마다 마귀의 장난으로 생각하고,

'마귀야 물러가라'고 소리치며 

떨쳐버리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하였지요.

 

그런데 
세 번째 지역장을 맡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주임신부님이 바뀌셨고, 신부님께서는 남성구역을 보시고

새로운 사람을 뽑아야 겠다고 생각하셨던지

 

어느날엔가

남성구역 지역장 및 총무들을 모두 소집 하셨고,

교리실에 모인 우리들은 투표로 총구역장을 뽑기로 했는데

서로가 내심으로는 '자기가 뽑히지 말아야할텐 데' 라고 생각하면서

투표에 들어갔지요.

 

당일 날 투표결과는 발표되지 않았고,

모두 궁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 갔지요.

며칠 후 퇴근 길에 차를 몰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우연히 주임 신부님 혼자 00 아파트 단지를 걸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되었고,

 

저는 반가운 마음에 차 문을 열고 "신부님~~~"하고 외치자

신부님은 얼굴을 알아보시고, 저의 차에 타서 하시는 말씀이

"비오 형제 집에 가고 있는 중이었는데..."라고 하시기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때렸지요.

 

'저의 집에는 어쩐 일로..?'
얼버무리는 순간 차는 집앞에 도착 하였고,

주차를 시킨 후 가방을 집에다 들여다 놓고 식당으로 갔더니,

 

신부님께서는 한참 동안 다른 이야기만 하시다가

느닷없이 며칠 전에 하였던 투표용지를 내놓으시며

 " 비오 형제가 당선되었는데, 비오 형제가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기 위해 오셨다"고 하시기에

 

저는 당황 하였고,

'현재는 직장이 포천이라 멀어서 안 되고, 기타 등등

다른 사람들이 핑계를 대며 지역장을 맡지 않겠노라고 이야기했던

그 모든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면서 거절의 의사표시를 하게 되었고,

 

빈 속에다가 소주 몇 잔을 연거푸 들이 마시게 되었으니,

얼그레하게 오르는 취기를 안주 삼아

'정말로 저는 그만한 일을 할 그릇이 아니다'는 것을

여러번 강조했으나,  신부님께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며 그 날은 그렇게 헤어졌고,

며칠 후 다시 만나게 되었으나 저의 입장은 완강하였지요.


 

마음의 준비도 안된 상태였고 레지오 단장에, 지역장에, 직장은

포천으로 아침 저녁 출퇴근을 해야했으니 정신 없이 바쁜 시간들이었지요.

 

그러나
"구역분과는
성당의 근간조직으로 구역분과를 활성화 해보자"고 말씀하시는

 

신부님의 말씀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하여,

그야말로 대 결단을 내리고 말았으니, 또 일을 저질러 버렸지요.

 

단,

조건이 있었는데 레지오단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지역장도 함께 하기에는 버거울 것 같아서

지역장도 넘기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지요.

다행히 레지오는 다른 형제님께서 단장을 맡아 주셨지만,

지역장은 서로가 떠넘기느라 맡을 사람이 없어서

신부님께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급기야 어느 형제모임 날 주임 신부님께서 참석하셔서

지역 형제님들을 설득하셨고,

어느 형제가 저희 지역의 지역장을 맡게 되었지요.

 

6년동안 제가 짊어져 왔던 0지역장을 내놓게 되었으니 그

날 저는 마음의 부담도 되고 지역장을 벗어나는(?) 속시원함에

줄 담배를 피워대기도 하고

폭음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했었지요.

 

집에 돌아와 루시아에게

"남성 총구역장을 맡게 되었다"고하자 "열심히 해보라"고 하기는 하는데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난감했었지요.

당시 여성구역은 조직이 잘 짜여져 있었고,

11개 지역에 구역장, 반장까지 있었으니

일 할 맛이 났으나,  남성구역은 활성화도 되어있지 않은데다가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이어져 왔으니

각종 행사라든가 피정, 연중 사업계획서 등등 어느 것 하나

매뉴얼화 되어 있는 것이 없었고,

 

그냥 이름만 전임에서 후임으로 바뀌어졌으니,

인수인계를 할 것도, 받을 것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한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랴 싶었지요.

 

그후

각 지역별로 형제모임을 참석하랴,

레지오 가랴, 거의 저녁마다 집을 나와야 했고

 

한 달이면 20일 정도를 성당일에 매달려야 했으니,

아이들은 어린데도 불구하고 주말에 어디 한 곳

마음 편하게 쉬어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지요.

약 3개월에 걸쳐 각 지역을 방문하면서

나름대로 지역의 특성을 파악하게 되었고,

 

형제모임이 결성되지 않은 지역은

형제들을 모아서 지역장을 뽑고,

총무를 뽑아서 새로이 뭔가를 해보려고 하였으며,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르면

여성구역처럼 반장까지는 안 되더라도

구역장까지는 가능하리라고 생각되어

아파트 동별로 몇 동씩 묶어서 구역으로 만들어 주고,

구역장을 뽑아 임명장도 주어 가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였지요.


남성총구역장이 된 후,
첫 작품이 0지역의 여성지역장님께서
울면서 말씀하시기를

"상계동의 대형교회 두 곳에서 일요일마다 대형버스를 몰고와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휠체어에 앉은채로 차에 태워 모시고 가는데

 

그 중에 우리 신자분들도 많이 간다"며 대책을 호소하셔서

남성구역에서 0지역을 위하여

매주 미사 때마다 차량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그외에도

소금장사를 비롯하여 바자회, 체육대회, 피정, 등산, 등등

여성구역과 함께 여러가지 일들을 해나가면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여러 사목위원들께서 열심히 도와주셨고,

덕분에 대과없이 임기를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조심스러운 것이라

전에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서서히 몸에 익어갈 무렵

 

때로는 이런 직책을 맡지 않고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데,

왜 이런 직책을 맡아서 속을 끓여야 하는가?

 

후회가 물밀 듯이 들었고, 서로가 남의 일로 생각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가슴아플 때도 많았지요.

 

그러나 이제는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그래도 신앙의 공동체가 있기에

주님 때문에 서로 만나고 부대끼고 살아감에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져봅니다.

 

그동안 0지역에서 총무로 시작하여

지역장을 거쳐 총구역장으로 봉사할 때까지

만 9년동안 저의 옆에서

총무로 또는 지역장으로 사목위원으로 도와 주셨던

많은 분들의 존함을 거론하고 싶지만

그분들께 누를 끼치는 것 같아서

존함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한 없는 고마움을 다시금 전해드리고싶고

주님의 은총이 듬뿍 내려주시기를 빌어봅니다.

 

그리고 묵묵히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하여 도와 주었던 내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내자도 00꾸리아 회계를 맡아서

연임을하고,

00레지오단장도 연임을 하고 있으니

요즈음은 저보다 더 바빠서 저는 외조를 하고 지냅니다.^^

아이들에게도 미안함이 앞섭니다.

봉사할 때 힘들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지만

이제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면 모두가 그리운 것을,

훗날 잘 살았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아직은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는 0지역에서 전임 지역장님들이 이사를 가셨듯이,

저도 떠나와 0지역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가끔 그 지역의 형제님들을 만나면

옛일을 떠올리며 파안대소를 하곤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을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셨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 길이

은총의 길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을 뿐이지요.

 

얼굴에는

웃음이 없고 여유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중계동성당 초기시절보다는

이제는 조금은 여유로운 웃음마저 보일 수 있다는 것에

한없는 감사함을 표하고

 

여러직책을 맡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봉사하시며

살아가시는 분들께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동안 부끄러운 고백을 하면서 낯뜨거워서 이 글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며 몇 번을 그만둘까 생각했는데,

성당에만 가면 저를 아시는 분들의 인사가 "다음탄은 왜 빨리 안올려?

재미있는데 빨리 올려. 몇탄까지 갈거야?라고 물으시곤 하셔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지금까지 저의 정제되지 못하고 졸필에 가까운 글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웰빙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웰엔딩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세상을 마치는 날 '정말 잘 살았노라'고 주님께 아뢸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깨어서 기도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2005년 7월 20일

박재준 (비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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