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어머니의 밥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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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건 [shinnara] 쪽지 캡슐

2003-04-15 ㅣ No.5433

 

어머니의 밥 그릇

아내는 오늘 아침에도 우리집 2층에 세든 가족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치매에 걸린 그집 노모가 우리 정원수들을 싹둑싹둑 잘라낸 것이다.
아내는 그 때문에 또 한 번 단촐한 신혼부부를 들이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15년째 우리 식구만 살던 집의 2층을 세놓은 건 두달 전이었다.

방도 많았고, 정원도 넓었고, K건설 이사로 있었던 시절에
내가 직접 감독하여 지은 집이기 때문에 집은 무척 튼튼했다.
돈이 필요해서 세를 놓은 것 아니었다.

아들 둘을 다 결혼시키고 나자 우리 내외는 부쩍 외로워졌고,
불이 꺼져 있는 2층을 볼 때마다 그 외로움의 골은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솔직히 그때마다 아들들에게 좀 서운한 마음도 일었다.

두 아들 놈 중 어느 한 놈도 빈말로라도, 부모와 함께 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도 나도 두 아들을 모두 분가는 시켰지만,
본심에서는 아니었다. 요즘 젊은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오로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자존심 강한 아내가 선택한 결론이었다.

신혼부부에게 2층을 빌려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한 건 아내였다.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시작하는 신혼부부를 옆에서 지켜보며 사는 것만도
즐거울 것 같다는 얘기였다. 아직 신혼부부인 제 자식이 있는데도
옆에서 데리고 살지 못하는 아내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해 나는 쉽게 승낙을 했다.

그런데 아내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대가족이 집을 보러 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전세금 4천만원이면 신혼부부가 연립주택에 단독으로 들어가 살 수 있는
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아내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서 결정된게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부부와 노모 한 분이
있는 가정이었다. 그들 역시 자녀들은 다 출가를 시켰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 집에 들어오기를 원했다.
무엇보다도 정원이 넓어서 노모가 답답해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2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든이 넘은 노모가 치매에 걸린 분이었던 것이다.
며느리와 아들을 향해 고래고래 악을 써대며 욕을 하는 소리가 한밤중에도 들려왔다.

심하면 우리 집 현관이 있는 곳으로 화분이 날아오기도 했다.
2층 베란다에 나와 치매할머니가 던져대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바람에
우리 부부도 잠자다 깨어 함께 소란을 떨어대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이사오기 전에 그런 사실을 밝히지 않았음을 따지러 올라간 아내에게
두 부부는 무조건 이해를 구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치매환자 단기보호소에 모시고 가니까
크게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변명이었다.

나보다는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2층 남자는 아침마다 노모를 춥지 않게
목도리까지 둘러씌우고 휠체어에 앉혀 산책을 시켜주었다.
아침산책은 하루도 빠뜨리지 않는 나는 남자와 자주 마주쳤고,
어느 날은 동행도 했다. 그러면서 그 집 형편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

5년 동안이나 앓고 있는 어머니의 치매 때문에 그들은 집까지 팔고
급기야는 전셋집으로 옮기는 사태까지 맞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치매는 돈이 많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은 치료받기가 용이하지만
중산층인 가정에서는 제일 애를 먹는 실정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생활보호대상자는 나라에서 뒤를 봐주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비싼 요양소나
시설 좋은 병원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노모를 위해 일주일에 두서너 번씩은 치매환자보호소에 가서 보내게 하지만
그것도 자기네 집 형편으로서는 만만한 게 아니라고 했다.

2층에서는 날마다 노모 때문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란이 끊이지 않았고,
생각다 못해 우리는 방음막까지 설치했다.
그러면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노모를 보살피는 이층 부부에 대한 존경심이 나도 모르게 싹텄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함께 하게된 산책길에서 2층 남자에게 물었다.
그 모진 상황에서도 자식된 도리를 다할 수 있는 비결이 대체 무엇이냐고.
그리고 그것은 진정으로 궁금한 일이었다.

"제가 죽을 때까지도,
아니 어쩌면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지요."

내 질문에 한참동안 빙긋이 웃고 난 이층집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3남3녀의 장남인 나는 어릴 때부터 일찍 철 든 조숙아였다오.
그럴 수 밖에 없었소.
아버지는 나이 마흔도 되지 않아 어머니에게 6남매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때 내 나이 열두살이었소.
고기잡이배를 타서 우리 형제들이 먹을 식량을 벌어들이던 아버지가 없고 보니
우리 가정형편은 더욱 말이 아니었소.
오죽하면 주위에서 자식들을 부잣집에 양자로 보내라는 충고까지 일삼았겠소.

제 뱃속으로 나온 자식을 누구에게 주느냐고,
아이들 아버지가 저승에서 그거 알면 다시 한 번 혀 깨물고 죽을 거라고
어머니는 누구도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소.
그리고 어머니는 배가 들어오는 부두로 나가 생선을 받아 파는 일을 시작했다오.

당연히 돈벌이가 잘 되지는 않았소. 어머니는 키도, 몸도 작은 여자였다오.
그러니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며 생선을 파는 일을 악착스럽게
하기는 힘들었겠지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생선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구해 오는 식량으로 우리는 배를 채우면 살았다오.
언제 한 번 포만감을 느껴보지 못하는 어린 동생들은
언제나 먹을 것만 보면 헐떡거렸다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소.
아무리 철이 들었다지만 배고픈 것까지 숨길 수 있는 건 아니었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걸 어쩌겠소.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었다오.
우리 어머니는 식사 때 언제나 밥을 반 그릇씩이나 남기는 거였소.
우리의 밥그릇과 크기도 같고 밥을 퍼담은 분량도 똑같은데 말이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그렇게 남긴 밥을 절대로 자식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소.
막내 동생이 그렇게 그게 먹고싶어 숟가락을 들고 달려들어도
주지 않더란 말이오. 그리고 그때마다 얼른 상을 치워버리니
숟가락을 들고 어머니 앞으로 간 동생은 소리 높여 울 수밖에.

그런 날들이 많아지자 동생들은 어머니가 없는 곳에서 어머니를 험담하기에 이르렀소.
어머니는 부엌에서 상을 들이기 전에 배부르게 먹고 들어오기 때문에
밥을 그렇게 많이 남긴다는 것이었소.
우리는 정말 그렇게 알고 있었소.

다만 철이 좀 들었던 나만은 어머니는 장사를 하러 이 동네 저 동네로
돌아다녀야 할 사람이니까 우리보다는 밥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소.
평소보다 좀더 작은 양의 식사를 했던 때였소.
어머니가 남긴 밥을 절대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으레 제 밥그릇에 있는 것만
먹곤 했던 막내가 그날은 유난스럽게 악착을 떨며
어머니가 남긴 밥을 탐하는 것이었소.

여느 때처럼 어머니는 남은 밥은 다음 끼니때나 먹는 거라며
급히 상을 들고 일어났다오. 막내도 만만치 않았소.
상다리를 붙들며 어머니의 밥그릇을 낚아채려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소.
바로 그 때였을 것이오.
상을 든 어머니의 몸이 기울면서 어머니의 밥그릇이 엎어지자
그 속에서 큼지막한 무 토막이 방바닥으로 퉁겨져 나오는 것이었소.

밥그릇 속에 쏙 들어가 높일 수 있게 모양을 내어 깎은 그 무 토막 위에는
밥알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소..."

그날 이후 나는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부모로서 우리 두 아들이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잊지 못할 애정을 심어준 적이 있었던가를.

-치매가족수기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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