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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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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8-01 ㅣ No.22

 

 

 

어느 고요한 밤 늦게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물...."

소녀가 공부하다 말고 잠깐 불러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음 날 음악 시험이 있어서 잠시 불러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해맑은 노래가 차고 투명한 겨울밤 하늘을 무질러 와서 나를 회한의 밀물에 젖게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40년은 어디로 흘러가 버렸는가.  내가 저들 또래에 불렀던 나의 노래 음표들은 어디에서 지금 방황하고 있는가.’

 

어느 포장마차 근처에서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  좌절된 용기와 누기진 삶을 변명하기 위하여.  그러나 이미 우리한테는 그 가련한 음표들을 불러 모아 앉힐 오선마저도 삭아 버린 지 오래이지 않은가.

 

내려앉은 어깨, 수염 길은 얼굴로 창에 다가서 본다.  문득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스치운다.

 

시간은 일종의 지나가는 사람들의 강물이며 그 물살은 세다.  그리하여 어떤 사물이 나타났는가 하면 금방 지나가 버리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새로 등장한 것도 또한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무상하며 하찮은 것인가.  눈여겨보라.  어제까지만 해도 태아이던 것이 내일이면 뻣뻣한 시체나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리니, 네 몫으로 할당된 시간이란 그토록 짧은 것이니, 이치에 맞게 살다가 즐거웁게 죽어라.  마치 올리브 열매가 자기를 낳은 계절과 자기를 키워 준 나무로부터 떨어지듯.

 

나는 창 저편 어둠 속에 떠오르는 얼굴을 본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나 전혀 생소한 얼굴.  그것은 너무도 많이 때 묻어 버린 나의 시간 때문이리라.

 

미우나 차마 버리지 못하는 창 저편의 얼굴에 살며시 뺨을 대보고 물러난다.  검지손가락 끝으로 낙서를 하고 입김을 불어 본다.

 

’비겁자.  나태한.  이중성.  가련한.’

 

 마침 떠오른 달빛 속으로 눈 덮힌 먼 산봉우리가 우뚝 나타난다.

오늘 밤에는 나도 저 산봉우리처럼 흰눈을 함빡 뒤집어 쓴 벌을 서고 싶다.

 

                      정채봉 감동언어 ’그대 뒷모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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