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정치 이야기 정치인 이야기 - 윤 학/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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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영 [mymoon] 쪽지 캡슐

2004-04-04 ㅣ No.2976

어릴 적에는 마을 어른들이 모이면 술상을 앞에 두고 주로 정치인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들의 정치인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여야당의 중진의원은 물론 장차관, 심지어는 태백산 어느 산골짜기의 국회의원 이름까지 줄줄이 그분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어느 때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가 누구보다 낫다느니 못하다느니 하며 언쟁을 하다가 서로 화를 내며 편을 갈라 다투기도 했다. 그렇게 다툰 후에는 몇 달씩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지냈다.

 

나는 국회의원들과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반대하는 것을 보면서, 또 그분들이 만나면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정치인들인 것을 보면서 ‘국회의원’의 역할이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정치인이 되어 보고 싶은 욕구도 생겼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올라온 서울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택시 기사 아저씨들도 학생들도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화제였다. 국민 모두가 정치인에 대한 관심이 넘쳤고 모두가 정치 전문가였다. 그런데도 정치가 잘못되어 우리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한탄하는 이야기를 늘 듣게 된다.

나는 요즈음 바른 사회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많은 분들이 과거 내 어릴 적 동네어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정 정치인들의 이름을 수없이 거론하는 것도 그렇고, 진보니 보수니 서로 편을 갈라 싸우고,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대화상대로조차 보지 않는 것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격렬하게 정치인들을 거론하면 거론할수록 과거 내가 어렸을 적처럼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대단한 사람들로 여길 것이다. 더구나 정치가 잘되어야만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여 모두들 정치인들에게만 모든 것을 의존하려 할지도 모른다.

시민단체들까지도 정치인 개개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눈앞에 보이는 운동만 전개하고 정작 우리 국민들이 가져야 할 정치에 대한 시각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는 등한히 한다. 국민들도 정치인에 대한 관심을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착각하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난과 지지에 열을 올린다.

 

87년 대통령선거운동이 한창일 때 나는 친구들과 무리를 따라 김대중씨 지지집회가 열렸던 여의도에서 시청까지 걸었다. 지역차별과 군부독재의 폐해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격이 크다는 것을 실감하며 이 나라에 정의가 없다고 매일 울분을 터뜨리던 때였다. 영호남의 지역차별을 타파하고 군부독재의 뿌리를 뽑아낼 분으로 나는 ‘대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김대중을 환호하며 여의도로 향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고 우리는 환호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김대중씨는 그 대선에서 노태우에게, 그 다음 대선에서는 김영삼에게 패했고 늘 그러했듯이 부정선거라고, 부도덕한 정권이라고 규탄했다. 우리는 그분의 주장이 맞을 거라며 그분을 동정하고 따랐다.

 

이런 우리들의 끝없는 지지가 10년 후인 97년 그를 대통령이 되게 했다. 나는 우리들의 염원대로 대통령이 된 그가 그 동안 끊임없이 부르짖었던 ‘없는 자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 ‘지역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정치’를 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있는 자들로부터 빼앗는 정책’ ‘능력있는 자를 기용하지 않는 정책’을 ‘없는 자들을 잘살게 하는 정책’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날만 새면 재벌을 개혁한다, 고위 공직자를 몰아낸다, 부동산을 잡는다고 하면서 무엇을 만드는 정책이 아니라 무엇을 없애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재벌 때문에, 공직자 때문에, 부동산 때문에 없는 사람들이 못사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붙어 다니는 정책으로 김대중 정권은 인기몰이를 하며 없는 자들을 몹시도 위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처럼 했다.

 

그분은 호남 사람 몇몇에게 자리를 주고 도로나 고속철도를 유치하는 선심성 호남우대 정책을 지역차별 없는 정치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발상은 영남 사람에게 자리 몇 개 주고 도로나 기반산업시설을 몰리게 한 과거의 정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갖지 못한 것은 가진 사람이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는 비난성 정책으로 갖지 못한 사람의 지지를 끌어내고, 호남 사람을 우대함으로써 호남 사람의 지지를 유지하려는 그 천박한 정책은 김대중을 열렬히 지지했던 우리를 너무도 부끄럽게 만들어 버렸다.

 

며칠 전 탄핵정국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의도로 시청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나의 과거를 본다. 그들 역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데 세상이 바뀔 거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누구를 끌어내림으로써 무엇을 하겠다거나 자신이 아닌 그 누구 때문에 무엇이 안된다며 남을 비난하는 사람을 더 이상 믿지 못한다. 우리가 못사는 것은 재벌 등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 때문이라거나, 개혁이 안되는 것은 야당 때문이라거나, 경제가 안된 것을 과거정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난이나 비판만으로 무엇인가를 쉽게 얻어 내려는 사람들만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보고 또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바꾸는 세상이란? 설령 남 때문에 무엇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신부터 성찰하는 사람이라야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어렵게 되는 이유를 정치로 돌렸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것이 정말 정치 때문이었는가? 내 행복이 정치에 달린 것이라면 나는 정치인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내 자신의 일보다는 정치인이 하는 일에 내 모든 것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행복이 정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라면 정치인에게 그렇게 관심을 쏟을 이유가 없다. 내가 친구들과 여의도로 달려간 것이 그 정치인의 세력확장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내 행복, 우리 공동체의 행복과 같은 진정한 정치 발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영양가 없는 일에 서로 감정을 붉히고 미워하면서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닐까? 내가 해야 할 일은 정치인을 통해 내가 바라는 지역차별타파, 빈부격차가 시정되어 주기를 바라는 생각을 접는 것이었다. 나부터 지역차별적 언사를 자제하고 내 아이들과 내 이웃도 그런 언행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빈부격차해소도 정치인에게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사람이라면 남에게 좀더 관대하고 내가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좀더 성실하게 생활해 나가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정치인은 자신의 당선이 먼저요 그 다음은 세력 확장이고 맨 나중이 정책실현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을 해 주리라고 기대하고 매일 시위를 하고 그들의 반대 세력을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내 자신에게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내 어릴 적 정치에 대한 관심을 쏟았던 것만큼 어른들이 모여 함께 산에 오르거나 음악도 듣고 노래도 하며, 또 시를 읊조리거나 불경이나 성서도 읽었다면 나는 그런 분야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그런 것들의 가치를 일찍이 체득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와 내 친구들이 성장했다면 우리가 대학이나 사회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음악과 미술, 사랑과 자비를 공통의 주제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회분위기였다면 우리 정치도 지금쯤 과거에 비해 참 발전해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선거가 다가온다. 나 어릴 때처럼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모여 또 정치인들에 대한 비난과 지지로 자신의 정의감을 과시하는 분은 없을지, 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정치에 대해 균형감 잃은 관심을 갖게 될 아이들은 없을지 걱정이 된다.

 

빌라도가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나폴레옹이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또 지금 부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누가 권력을 잡았다고 즐거워할 일도 아니요 누가 권력을 빼앗겼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빌라도도 망했고 나폴레옹도 망했지만 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은 정치권력의 향배와 아무 상관 없는,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망하지 않는 진리에 가슴을 여는 일일 것이다. 인상이 좋아서,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정치인의 내면을 보는 눈을 길러 그 열린 눈으로 내가 이번 선거에 임한다면 우리 정치 문화도 분명 나아지지 않겠는가?

 

동족이 정복자 로마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고 예수께 달려갔으나 예수는 오히려 그에게 먼저 자신부터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수는 불의를 보고도 묵인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었던가? 아니다. 정치권력의 향배에만 모든 것을 의지하려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일에 눈을 뜰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겠는가? 탄핵 찬반에 열을 내지 말고 진정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두가 심사숙고 한다면 이번 탄핵정국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야당에게도, 또 우리 모두에게도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 월간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4년 4월호 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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